조형성과 창작성, 실용적인 면과 조화 이뤄야
이론과 실기 겸비 公人의 혹독한 수련 대결실 ● 국가의 흥망성쇠 생사고락 혼연일체 왕위 계승 또는 국가 권력 이양의 징표로서 사용되며, 나라를 상징하는 도장인 국새(國璽), 우리나라 천여 년의 흥망성쇠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온 국새, 21세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새는 국가의 권리와 정통성을 상징하며, 헌법개정 공포문 전문과 5급 이상 공무원 임명장, 훈·포장 증, 중요 외교문서 등을 날인하는 데 사용된다.
고대 중국의 왕들은 금으로 만든 인장을 사용하였다. 특히 진시황제 때 ‘화씨벽(和氏璧)’이라는 귀한 옥을 얻어 천자의 인장으로 새겨 국새를 옥쇄라 하였으며 역대 황제들이 옥쇄를 권위와 국권으로 사용한 것이 시초라 볼 수 있다. 삼국지연의라는 소설 첫머리에 “화씨벽”이라는 옥쇄 때문에 난세가 펼쳐지고 영웅호걸이 일어나 나라를 일으키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역사를 통해 보면 국새를 얻지 못한 왕은 신하들이나 백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과거 국새는 하늘이 내린 것이고 나라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고려·조선 시대에는 국인(國印)·새보(璽寶)·어보(御寶)·대보(大寶)라 하여 왕의 인장이 국새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대·교린의 외교 문서 및 왕명으로 행해지는 국내 문서에 사용되었다.
국새는 시대와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으나, 외교문서(특히 대중국 관계)에 사용되는 국인(國印, 대보로 통칭)과 국내용 어보로 대별된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이전까지의 국인은 대부분중국 역대 왕조의 황제들에 의해 사여(賜與)되어 들어왔고, 기타의 어보들은 국내에서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 국새 파문 이후 무명의 장인등극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5월 5일 대통령령 제83호로 새로운 국새를 마련하였고, 1963년 1월부터 새 국새 규정에 따라 가로, 세로, 높이 7cm의 정사각형에 한글 전서(篆書)로‘대한민국’이라고 가로로 새겨진 국새를 사용했다.
이후 1999년 2월에 가로, 세로, 높이 10.1cm의 새로운 국새를 마련하였으며 2005년 국새에서 균열이 발견되자, 제4대 국새를 제작하여 2008년 2월부터 사용하였다. 제4대 국새는 가로, 세로, 높이 9.9cm로, 손잡이는 봉황모양, 글씨는 훈민정음체였다.
그러나 제4대 국새단장이었던 민홍규씨의 사기행각으로 인해 국새가 ‘가짜’로 밝혀지는 국새제작부정으로 제4대 국새는 폐기되는 등, 국·내외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소동을 치렀고, 2011년 행정안전부의 국새제작공모를 통해 당선된 제 5대 국새장(인뉴 부문-손잡이) 한상대(54) 장인의 봉황 한 쌍에 만개한 무궁화가 하늘을 받치고 있는 모양의 새로운 국새가 선정, 이를 사용하고 있다.
무명에 가까운 한상대씨가 대한민국 제5대 국새장인에 등극 할 수 있었던 것은 제4대 가짜국새파동을 겪으면서 5대 국새공모는 학맥이나 인맥보다는 투명성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오직 실력으로만 겨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제5대 국새 심사위원들이 남긴 심사평에 의하면 “조각기술이 섬세하며 안정적인 자세의 봉황과 적절히 조화된 생략과 강조의 부분이 잘 표현 돼, 상징의 표현을 넘어 국운의 기상을 잘 상징화 했다”고 호평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 제5대 국새 심사위원들이 남긴 심사평에 의하면 "조각기술이 섬세하며 안정적인 자세의 봉황과 적절히 조화된 생략과 강조의 부분이 잘 표현 돼, 상징의 표현을 넘어 국운의 기상을 잘 상징화 했다."고 호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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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면 볼수록 좋은 것이 ‘진정한 디자인’모든 미술 작품이 그렇지만 국새는 조형성과 창작성이 실용적인 면과 함께 강조돼야 한다. 또한 국가의 보물답게 국새에서 품어나는 전통성도 뛰어나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제5대 국새장인 한상대, 그는 국새장인에 등극은 했지만 문화계 및 주류언론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 이유는 ‘가짜’ 국새 파동으로 인해 투명성과 공정성이 보장되자 여느 때보다 실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으나,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인간문화재, 대학교수, 유명작가 등 실력가들과 경합을 벌인 끝에 무명의 지방대 출신인 한씨가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국새 파문을 계기로 국새 장인의 처우 문제가 개선돼야 한다고도 했다.
"저에게 국새 만드는 대가로 500만원 줬습니다. 이건 나라 망신이에요. 내가 돈을 더 받겠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국새 장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국새 파문이 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교수가 아니고서야 국새 장인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데 누가 남을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번 공모전은 손잡이(인뉴)를 포함한 전체 모형과 '대한민국' 인문(전각)을 따로 선정했다. 순금 2.6kg이 들어가는 주물 역시 다른 곳에서 작업을 한다. 그렇지만 국새의 전체적인 디자인을 그가 했기 때문에 장인 중의 장인이라 불릴 만하다.
한 씨는 제5대 국새장인으로 선정된 이유를 묻자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이론은 잘 알지만 실기에 약하거나 그 반대인 명인들이 많았다. 나는 이론 공부도 했지만 현장에서 20년 넘게 실무를 해온 사람이다. 그것이 먹혔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한씨는 익산원광대학교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하면서 조각에 대한 이론과 실기를 배웠다. 하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장인들보다 기능이 딸린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전북 익산(모현동)이 고향인 그는 대학 졸업 후 무작정 상경했다. 금속 공예 전반을 익히겠다는 일념으로 상경한 생활은 시련의 일상이었다. 남대문 시장의 금속공예업체에서 간신히 자리를 얻었으나, 잘 곳이 없어 상자를 깔고 밤을 지샌 일도 있었다. 취업한 곳에서는 박대가 계속됐다. 기술 노출을 꺼린 이들은 그가 어깨 너머로 익히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견습공으로서 많은 나이에 혹독한 수련과정을 거친 셈이다. 대학에서 배운 이론과 실습, 여기에 무명 금속공예 장인들의 솜씨를 익히기 위해 그는 가공업체 공방수습생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의 서울 생활은 녹록치가 않았다. 돌아갈 집이 없어서, 혹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는 등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금속공예분야는 대공, 세공, 정밀주조, 보석가공으로 나눕니다. 이 네 종목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아야 됩니다. 여기에 독창적인 디자인을 만들어 내야 장인의 대열에 들어갑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숨은 장인을 찾아 20여 년을 혹독한 수련을 통해 테크닉을 익혀왔습니다."
● 국운융성, 태평성대 '형상화 수작' ▲ 공인의 수련과정에서 감각과 판단이 한결 빠르게 움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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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씨의 이번 국새는 봉황에 무궁화와 태극문양을 넣어 나라의 발전과 국운융성, 국민의 화합과 태평성대의 의미를 담았다. 또 봉황의 전통적인 모습과 꼬리, 깃털을 응용해 조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현장에서 배운 기술과 노하우를 적용시켰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이론이나 명성에만 의존하는 대학교수들의 작품과는 궤를 달리했다.
천년을 이어 가는 선의 아름다움 그의 국새 당선은 이론과 실제 제작의 결합체이다. 그간 현장 제작에 강한 장인들이 이론을 외면한 추세와 이론에 강한 대학교수들이 제작 현장을 소홀히 했던 빈틈을 파고 든 것이다.
그로서 ‘국운상승’이란 미래의 가치를 이미지화하는데 기본적인 조화와 균형감의 완성도로 승부를 봤다. 그는 궁중유물 재현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았지만, 특별한 상복은 없었다. 공모전에서 수상을 20여 차례, 기능경기대회 심사장과 심사위원 등으로 평범한 세공장인의 길을 걸었다.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기념 이봉주 마라톤화와 월드컵트로피 금형제작을 통해 잠깐 유명세를 탔을 뿐이다. “보면 볼수록 좋은 것이 진정한 디자인이다. 처음에는 좋아 보이다가 금방 질리는 것은 디자인으로서 상품화가 어렵다.”그것을 터득하는 과정이 그간의 공방 생활이었다.
그는 장인들이 60년대에 혹독한 수련과정을 거치며 고생하던 과정을 90년대에 거쳐야 했다. 공방수습으로는 늙은 나이이기도 했지만, 이론을 갖춘 공인의 수련과정에서 감각과 판단이 한결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이제 “눈 감고하는 조각을 완성하는 실력을 갖췄다”고 자평할 정도이다. 그만큼 조각에서 손과 이미지의 감각이 일체화됐다. 과정은 혹독했다. 남대문 보석세공 공방에서 팥알만 한 산호비취를 20여 년간 깎았다.
앞면 뒷면은 물론 어느 면을 둘러봐도 아름다운 입체의 디자인 감각이 그렇게 완성됐고 전체 선의 조화가 관건인 금속조각의 장벽을 뚫었다. “주물 공정에서 미세한 디자인 선을 살리는 것이 관건이다. 디자인이 생명력이 없으면 작업 후에 이상한 선이 나온다.”고 한상대 장인은 선의 미학을 말한다.
20년 넘게 귀금속 산업현장에서 대공, 세공, 정밀주조, 보석가공, 디자인 등 전통금속공예가로 활동 중인 한상대 씨는 MBC 전통사극 주몽, 선덕여왕, 이산, 동이 등에 쓰인 왕관과 비녀, 검 등 다양한 장신구를 제작하고, 궁중유물인 고궁박물관 소장 삼인검을 재현하기도 했으며, 20여 차례의 공모전 수상과 기능경기대회 심사장 및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어느 정도 하면 끝날 줄 알았더니 모르는 게 자꾸 나와요.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게 별 것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뛰어난 후계자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제자를 키우지 못하면 중도에 끊길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래서 밥벌이를 위한 작품보다 나만의 작품에 집중하고 싶은 거죠.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합니다."
공예분야의 인간문화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전통금속공예 외길을 걸어온 한상대 씨는 “대학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전통공예와 문화상품 등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싶다.”는 외길 노익장 포부를 담담히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