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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4.06.20 [00:25]
<신년특집> 대(代)를 이은 동행(제11회)
 
우종희 작가

J작가 수필집에 투영된 아버지를 통해

나에게까지 연결된 귀한 인연의 신비

 

부친께서 심혈 기울인 우씨네 과수원

만물박사 아버지주민 희노애락 샘터

 

작별하신 부친 1주기‘J와 극적 조우

이젠 삶의 길잡이만남 동행자 인연!

 

▲ 휴머니스트로서 다정다감하셨던 부모님

 

아낌없이 나누시던 아버지

 

▲우종희 작가 

내 책장에는 아버지의 유품인 얼룩이 있는 오래된 수필집이 있다. 아버지 손때가 가득한 J작가의 수필집을 보며 아버지를 통해 나에게까지 이어진 귀한 인연을 찾게 되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은 서산에서 과수원을 운영하셨다. 원두막에 앉아 고개 숙이면 울타리 한구석에 아버지가 일부러 만들어 두신 개구멍이 보인다. 어둑해질 즈음 개구멍으로 살금살금 넘나드는 동네 개구쟁이들을 보고 얘들아, 포도 한 알씩 따 먹지 말고 한 송이씩 많이 따 먹으렴. 허허.” 아버지는 허탈 웃음을 웃으시곤 하셨다.

 

누가 아프다고 하면 달려가 치료해 주고, 가정사까지 상담해 주어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를 '만물 박사'라 불렀다. 아버지 덕분에 설날에는 세배하러 오는 분들이 집 앞에 줄을 섰다. 아버지가 정성 들여 가꾼 덕에 우씨네 과수원집복숭아는 맛있기로 소문이 났다.

 

그렇게 정든 복숭아 과수원을 뒤로하고 자녀교육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 안양으로 이사했다. 관악산이 내려다보이는 유원지 근처에 있는, 정원이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아파트였다. 그때 만난 인연이 J 작가이다.

 

나는 워킹맘으로서 학교 일로 바쁘던 때라 큰딸을 부모님이 돌봐 주셨다. 주말마다 친정에 가면 401호와 402호 문은 항상 열려 있고, 양쪽 집 아이들은 두 집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다. 아버지는 자주 나에게 J작가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작가이면서 겸손하고 교양 있어서 말이 잘 통한다고 하셨다. 고향을 떠나 외로워하시던 아버지에게 좋은 이웃이 생긴 것이다. 아버지와 J 작가는 일주일에 두세 번쯤 약수터를 오가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J작가의 수필집 아버지의 이웃사랑

 

아버지가 남겨준 J 작가의 수필집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글도 들어있어 내가 모르고 있던 아버지 모습을 알 수 있었다.

 

내겐 멋진 할아버지 친구가 한 분 계신다. 연세로 따지면 내가 딸 정도 되겠지만, 우리 아이들 부르는 대로 나 역시 할아버지로 부르며 지내고 있다. 바로 우리 아파트 옆집에 사시는 분이다.

 

한창 바쁜 남편은 집안을 돌볼 겨를이 없을 때라 남자 손길이 필요할 때면 주저 없이 부탁드려도 조금도 귀찮은 기색 없이 기꺼이 집안 곳곳을 내 집처럼 돌봐 주기도 하고, 외가 할아버지 모두 안 계신 아이들에겐 할아버지 역할을 톡톡히 해 주신다. 난 요즘 할아버지 따라서 이틀에 한 번씩 유원지에 있는 약수터에 물을 뜨러 간다.

 

약수터에 오가는 4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삶의 교훈적인 말씀, 정치경제문학에 이르기까지 기탄없이 의견을 주고받는데 우리의 대화가 막히는 법이 없다. 유난히 인복이 많은 내게 옆집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누가 뭐라든 우정이라 말하고 싶다.” -J작가의 수필집 빛으로 여는 길중에서

 

J는 누구일까? ‘사진 제일 마지막에    

 

그렇게 몇 년을 함께 지내던 J 작가는 서울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한참을 더 사시던 부모님은 6남매를 모두 결혼시킨 후, 어머니의 제안에 따라 온양으로 이사해 잉꼬부부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지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고관절 골절이 되어 결국 그 합병증으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못다 쓴 아버지의 글

 

아버지는 가족이 모일 때마다 동의보감을 들고 자랑스럽게 가족사를 말씀하시는 것을 좋아했다. 손주들은 할아버지의 말씀이 옛날이야기인 듯 재미있어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느 날, 어두운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나도 책으로 내고 싶어서 글을 썼단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내면 몇 권은 될 거야. 5대 독자인 내가 일곱 살에 대산에서 최고 책임자의 의생(醫生)이셨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 세 분을 모시고 살아왔지.

 

나도 인천 도립병원에서 의생이 되려고 했는데 해방이 되어 나를 가르쳐주던 박 의사와 이별하게 되어 의사의 꿈을 접었지. 과수원을 하며 그때 배운 것을 토대로 동네 사람들 아프면 치료해 주기도 했지. 너희들이 공부 잘하는 모습을 보면 하늘을 나는 것처럼 기쁘기도 했단다.”

 

아버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독백하듯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동안 기록한 것을 다 태웠단다. 누군가는 아파할 것 같아서.”

 

여운을 남기는 이 말씀이 너무나 아프게 다가왔다. 세 분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오신 아버지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그 한마디 말씀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슬픔은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덜어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러 어둑한 아파트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버지 내음이 물씬 풍긴다.

 

평소에 자주 해 드시던 닭발 요리 냄새가 스멀스멀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급히 문을 닫았다. 창가에 놓인 나지막한 책꽂이에는 동의보감, 생활의학전서, 주소록, 일기장과 함께 J 작가 수필집이 꽂혀있었다. J 작가가 선물한 책을 수십 년 동안이나 소중히 간직하고 글을 쓰고 싶은 소망을 꿈꾸어 오신 아버지, 누렇게 변한 책을 보니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J와의 극적 조우 ()를 이은 동행

 

아버지의 1주기를 앞두고 J 작가를 찾으려 포털사이트를 검색해 보았다. 작가의 삶을 부러워하던 아버지와 내가 오래전 친구를찾아 나선 것이다.

 

몇 단계 검색 후 작가의 지인과 연락이 되었다. 내 연락처를 주고 전화를 부탁하니 바로 걸려온 반가운 J 작가의 음성, 그날 오래도록 통화를 하였다. J 작가는 깜짝 놀랐다며 바로 그 전날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셨다고 했다. 꿈에서도 여전히 꽃을 가꾸고 계셨다는 것이다.

 

오늘 이런 전화를 받으려고 꿈을 꾼 것 같다며 놀라워했다. 40년 전의 인연이 큰 줄기가 되어 다시 이어진 것이다. 아파트에서 만난 이웃집 할아버지의 가족을 기억하고 무척 반가워하는 J 작가의 따스한 목소리를 들으니 마치 아버지가 곁에 계신 듯한 느낌이 든다.

 

아버지 기일에 모인 형제들에게 안양에 살던 J 작가를 만났다고 전하니 저마다 기억하는 예전 이웃집 이야기로 한창 꽃을 피운다. 요즘은 이웃 간에 소음분쟁으로 서로 다투기도 하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삭막한 아파트 생활 속에서, 우리 가족은 40년 전의 아파트 이웃사촌을 다시 만난 것이다.

 

그 후 J 작가는 나의 은퇴 후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며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부모님의 정다웠던 동행자가 나에게까지 이어져 훈훈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

 

정년퇴직 후 우리가 다녀온 곳에 대한 인문학적 이야기를 올리는 은퇴 부부의 생애기행이라는 블로그에 몇 년 전부터는 J 작가가 소개해 준 평화의 길을 매달 함께 걸으며 생명·생태·평화의 가치를 찾아 글을 쓰고 있다.

 

내 블로그를 좋아하는 동생이 평화의 길에 대한 글을 보고 누나, 나도 그 길을 걷고 싶어라고 하여 지금은 함께 걷고 있다. 올 때마다 새벽에 일어나 직접 갈아 내린 향기로운 커피와 간식을 들고 와 주위 사람을 기쁘게 한다. 그런 동생의 모습에서 아낌없이 나누시던 아버지를 본다.

 

약수터를 오가던 60대 아버지와 30대 초반의 J 작가, 이제는 나와 동생이 대()를 이어 J 작가와 함께 평화의 길도 걷고, 아름다운 인생길도 같이 걷고 있다. 40년 전의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시고, 자녀에게 멋진 인생의 동행을 만들어 주신 아버지, 셋이 걷는 평화의 길마다 아버지도 함께 걷고 계실 것이다.

 

▲ 따뜻한 성품을 지닌 남동생과 함께

 

우종희 프로필

()학교장. 중학교 국어교사로서 언어 경험 중심 독서 교육에 전념, ‘은퇴부부의 생애기행독서·여행 블로거, 디지털문인협회 회원, 고양미술인협회 회원, (共著)‘DMZ 평화의 길을 걷다1’

 


원본 기사 보기:모닝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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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4/01/25 [18:36]  최종편집: ⓒ womansen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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