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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0.21 [07:54]
지구촌 오지 초교파 ‘선교사역’ 굳건한 반석
<재조명> 믿음의 거인 찰스 스터드(Charles Thomas Studd)(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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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Jesus Christ is God and died for me, then no sacrifice can be too great for me to make for Him.”(“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내가 그분을 위해 하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클 수 없습니다.”)

 

 

▲ 스터드는 중국에서 18, 인도에서 6, 그리고 중부 아프리카 오지에서 나머지 18년 여생을 71세로 소천하기까지 선교지의 외로운 교회를 지키면서 온전히 헌신했다    

 

 

 

부와 권세 명예 모두를 가지다

 

19세기말 영국에서 귀족들의 선망이자 최고의 명문인 사립학교 이튼(Eton) 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Cambridge)를 졸업한 한 명석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부모가 극히 부유한 최상류층 집안 출신으로서 삼형제가 모두 영국의 최고학부를 나왔다. 게다가 그는 당시 영국의 국기(國技)라고 할 수 있는 크리켓 국가대표 주장선수로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날린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다. 더욱이 그에게는 장차 영국의 전형적 정치가로서 장래가 활짝 열려 있었다.

 

다름 아닌 그 이름은 영국이 낳은 불세출의 선교의 영웅 찰스 토마스 스터드’(Charles Thomas Studd)이다. 오로지 믿음 선교에만 전적으로 헌신해온 WEC 창립자 스터드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인 1860122일 아버지 에드워드 스터드와 어머니 도로시 사이에서 삼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 2년 앞서 장남 키니스톤(Kynaston)1858년 출생했으며, 이어 조지(George)가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에드워드 스터드는 인도에서 염료를 재배(황마)하는 농장을 소유주로 엄청난 돈을 모은 탁월한 사업가로 영국에 돌아와 경마를 하며 한가한 여생을 보냈다.

 

그런데 1875년 스터드가 14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찰스 스펄젼과 함께 영국에 복음의 불길을 지핀 미국의 유명한 부흥 강사 D.L 무디(Moody)의 전도 집회에 참석하여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된다. 그 당시 부친은 경마에서 최우상을 탄 말을 팔고 경마에서 손을 떼었다 

 

▲ 첫째형 키니스톤(왼쪽), 스터드(가운데), 둘째형 조지(오른쪽) 3형제 모두 크리켓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리고 부친 에드워드 스터드는 교회의 성경 공부 모임에 자발적으로 참석하면서 가정에 혁명이 일어났다. 저택 거실에 의자와 소파 등을 갖춰 놓고 런던에서 뛰어난 성경선생님들을 모셔와 친척들과 친구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오로지 전념했다.

 

드디어 3형제는 아버지의 헌신적 열정적 노력에 결실을 맺어 스터드가 18세 되던 해 영적 회심의 극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찰스 스터드는 이렇게 당시를 회고한다.

내가 회심하기까지 나는 아버지로 인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아버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재빨리 잠자는 척 해야 했고, 아버지가 오시는 것이 보이면 발소리를 죽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가 결실을 맺어 아버지 친구이자 선교사 한분이 집을 방문하였고 그의 전도로 인해 같은 날 세 아들 모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된다.

 

 

미지근한 신앙의 종말극적 거대한 전환점

 

운동을 좋아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스터드는 어려서부터 사냥과 크리켓, 그리고 멋진 경마를 했다. 그는 당시 상류사회에서 누리는 모든 안락함을 맛보고 성장했다. 세 형제 모두 크리켓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스터드는 열광적으로 크리켓에 빠져들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이튼(Eton)시와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뛰어난 크리켓 선수이자 주장으로 활동했다. 영국 런던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세계적인 대학 케임브리지는 뉴턴, 바이런, 워즈 워드 등이 수학했던 곳으로 유명했다.

 

그는 1879년 캠브리지의 트리니티(Trinity college, Cambridge UK) 대학에 진학한 후 4년 동안 대표 선수로 뛰었다. 1882년 대학 3학년으로 '영국의 가장 위대한 크리켓선수' 라는 격찬을 받는다. 스터드의 투구와 타격은 완벽에 가까웠고 반세기동안 깨지지 않는 경이적인 기록에 더해 쾌활한 성격, 좋은 인상, 친절한 마음으로 대학 내에서 최고의 인기 스타였다.

 

▲ 화려한 명성과는 대조적으로 스터드 신앙생활은 무기력했고 결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은 없었다. 이런 그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명성과는 대조적으로 스터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멀어져 갔다. 그의 신앙생활은 무기력했고 가끔 성경 공부 모임에는 참석했으나 결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은 없었다. 이런 그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1884년 그의 둘째 형 조지 스터드가 죽음의 목전에 이른다. 꽤 심각한 병에 걸린 것이었다. 그는 병원에 문안 갔다가 깊은 고민에 빠진다. “이 세상의 명예와 쾌락, 그리고 부가 병으로 죽어가는 형에게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나 역시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극적으로 형의 건강이 회복되자마자 스터드는 무디의 캠퍼스 집회에 참석하며 설교를 듣게 되면서 다시 구원의 기쁨을 되찾는다. 스터드는 세상을 향한 마음에서 완전히 돌이켜 복음을 위한 헌신을 다짐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바, 스터드의 부친은 주님을 영접한 후 모든 사람들에게 이 예수를 전파하기 위해 주야로 뛰어 다니면서 전도에 힘쓰다가 과로와 다리 혈관파열로 세상과 작별했다. 부친의 뜨거운 전도를 통해 영국 상류층에 전도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어졌으며, 그의 복음주의적 신앙은 세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세 아들 중 둘이 오지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된다.

 

스터드는 크리켓에 쏟은 의지와 정열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바치겠다고 결심하였고, 스터드의 친구들인 크리켓 선수들이 차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모친의 강력한 반대캠브리지 세븐과 선교지로

 

 

18852월 소위 케임브리지 7인이라고 불리는 스탠리 P 스미스, M 비우챔프, 윌리엄 W 캐슬스, 딕슨 E 호스트, 아서 T 폴힐터너, 세실 H 폴힐터너 등과 함께 스터드는 마침내 1885년 중국으로 출발했다   

 

 

스터드는 행복한 생활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비결이란 책을 읽으면서 완전한 자기 부인과 절대적인 믿음을 배우게 된다. 이에 스터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된다. 이에 스터드는 해외 선교에 대한 불타는 사명감을 갖고 하나님의 구체적 인도하심을 구한다.

 

마침 스터드는 친구의 초청으로 허드슨 테일러와 함께 중국내륙선교회(CIM)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므카시 선교사의 고별 파송 예배에 참석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수많은 중국인들의 영적 갈급함에 마음이 요동쳤다. 스터드는 중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을 수밖에 없었다.

 

스터드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모두 신앙과 구제에 쏟아 부으면서 중국선교사 자원이라는 대결단에 이른다.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내륙선교회에 5천파운드, 런던의 기독교 구제사업가 홀랜드에게 5천 파운드, 인도구세군 대장인 부스 터커에게 5천 파운드(인도 선교사 50명을 새로이 파송했다), 무디에게 5천 파운드(무디는 이를 무디성경학교를 건립하는데 사용했다), 고아 사업가 조지 뮬러에게 5천파운드 및 기타 잔액을 여러 곳에 기증하였다.

 

이처럼, 스터드는 완전한 무일푼으로 중국 오지 선교사의 길을 걸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 약관 25세였다. 이로 인해 그는 형과 어머니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친다. 어머니의 눈물어린 간청에 스터드의 마음은 흔들렸다. 그는 어머니의 눈물을 보니 선교사로 갈 수도 없고 또 중국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는 갈등 속에서 기도하다가 성경책을 폈다. 그런데 한 구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확신하게 되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마태복음 10:36) 이 말씀으로 그의 길은 분명해졌다. 스터드의 확고한 결심을 알았을 때 어머니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의 남은 여생동안 그를 진심으로 후원하였다.

 

그러나 혼자만 가는 길이 아니었기에 힘들었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다. 스터드가 중국 선교사로 떠나기까지 영국 선교사에서 회자되는 것은 캠브리지 세븐’(The Cambridge Seven)이다. 캠브리지 세븐은 스터드를 포함하여 중국에 선교사로 함께 가게 될 든든한 7인의 후원군을 의미했다.

 

크리켓스타 스터드가 중국에 선교사로 간다.”는 발표는 대학가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수주일 후에 여섯 명의 청년이 더해졌다. 그들에겐 캠브리지 세븐이란 별명이 붙여졌다. 스터드와 함께 이들은 중국을 떠나기에 앞서 1년 동안 각 대학을 다니며 집회를 가졌는데, 이때 학생들 사이에 부흥의 열풍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 캠브리지 세븐은 학생복음운동의 원조이자 대명사가 되었다.

 

스터드와 디엘 무디는 학생자원자운동인 SCM(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놀라운 이정표를 세웠다    

 

 

잠시 배경을 알아본다. 1882년 캠브리지 대학에서는 경이적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D.L 무디가 캠브리지 대학에서 한 주일 동안의 집회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가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던 대학생들이 그의 설교 말씀에 반응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학생들이 개종하였다. 그 중 상당수가 선교에 헌신하게 됐다.

 

특히 당시 대학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 중 일곱 명이 선교에 헌신한 것이었다. 그들이 바로 캠브리지 7이다. 운동과 사회활동에 있어 리더였던 일곱 우등생들이 그들 자신을 세계복음화에 드린 것이다. 이 젊은이들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전역을 다니면서 다른 학생들을 선교에 헌신하도록 동원했고, 드디어 이들 7인은 18852월 중국으로의 향해 길에 오른다.

 

 

중국선교에 위대한 발을 딛는 7!

 

▲ 스터드는 먼저 중국선교의 사명을 깊이 인식했다. 중국내지선교회(CIM) 대표였던 허드슨 테일러를 만난 뒤 CIM 협력회원이 됐다. 중국식 복장을 한 허드슨 테일러.    

 


중국 복음화의 초석을 놓은 허드슨 테일러
(Hudson Taylor)1853년에 중국에 첫발을 내딛었고, 1865년 중국내륙선교회인 CIM(China Inland Mission)를 창설하였다. CIM의 후신인 OMF(Overseas Missonary Fellowship)1951년 중국 공산화로 인해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철수하면서 동아시아로 선교지를 확장하고자 1964년에 이 명칭으로 바뀌었다.

 

스터드는 먼저 중국선교의 사명을 깊이 인식했다. 중국내지선교회(CIM) 대표였던 허드슨 테일러를 만난 뒤 CIM 협력회원이 됐다. 이어 그는 18852월 소위 케임브리지 7인이라고 불리는 스탠리 P 스미스, M 비우챔프, 윌리엄 W 캐슬스, 딕슨 E 호스트, 아서 T 폴힐터너, 세실 H 폴힐터너 등과 함께 스터드는 마침내 1885년 중국으로 출발했다. 이들 중 호스트를 제외한 6명이 캠브리지대 출신이다.)

 

갓 졸업한 여섯 명의 캠브리지 졸업생들과 함께 떠난 고난의 길,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고난의 시간이었다. 스터드는 매일 새벽 2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촛불을 밝히고 성경을 읽었다. 4시면 선교여행길에 나섰다. 한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경우 아침식사 후 중국어로 기도하고 점심식사 전까지 복음서를 34시간씩 읽었다. 협소한 잠자리나 헛간 같은 방, 불결한 여인숙은 능히 함께 해야할 대상이었다.

 

▲ 중국에서 현지 사역에 임하던 스터드     

 

그는 중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구세군과 함께 선교 역사를 섬기던 아일랜드 처녀, 브리스길라 스튜어트(Priscilla Steward) 양과 결혼하여 4명의 딸을 낳았는데 모두 중국식으로 양육했다.

 

그가 중국 북부에서 일한 기간은 어려움으로 가득했다. 그들이 처음 살게 된 집은 흉가였고, 그들이 5년 동안 문밖에 나서기만 하면 중국인들로부터 양귀라는 심한 저주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점차로 그들과 친해졌고, 생활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브리스길라는 여자들 사이에서, 스터드는 아내와 함께 아편중독자 요양소 사역에 힘썼다. 7년 동안 요양소에서 약 800명이 치료를 받고 새 삶을 살도록 도우면서 그리스도께 영접했다. 그러나 예배당과 그의 집은 파괴되곤 했다. 심지어 생명의 위협도 받았다.

 

 

중국에서 돌아와 대학생 선교자원운동촉발

 

스터드는 건강이 악화되어 가족과 함께 중국에 온 지 10년만인 1894년 영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로부터 6년 동안 건강이 좋지 않은 악조건 하에서도 스터드는 미국과 유럽 전 지역 캠퍼스를 순회하면서 쉬지 않고 강연과 집회에 열중했다. 심한 과로와 영양부족에 시달렸다. 그에게 휴가란 임지의 변경을 의미할 뿐이었다.

 

스터드는 D L 무디 초청으로 미국에서 18개월간 머무르면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집회를 쉴틈 없이 인도했다. 허버트 케인은 수천 명의 학생들이 그의 집회에 모여들었는데 때로는 하루에 6차례나 집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회를 통해 수백 명의 학생들이 해외선교사로 자원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이는 오직 내 삶을 취하시어 감춘 당신을 드러내는 십자군이 되게 하소서란 단 한 가지 이유뿐이었다. 이에 스터드는 무디와 함께 영국과 유럽을 위시하여 미국의 수많은 학생들이 선교사로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학생 복음 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진다.

 

미증유 대사건 학생자원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하나의 놀라운 운동의 시작이었다. 학생들이 스스로 자원에서 선교에 헌신하는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 1887년 말까지 2,106명이 선교사 자원 선언서에 서명했다. 그중 500여명이 여성들이었다. 미주대학생선교운동의 대명사인 SVM은 이렇게 시작됐다.

 

188850명의 학생대표들이 미국 매사추세츠 주 노트필드에 모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해외선교를 위한 SVM을 정식 출범시켰다. 1891SVM에 의해 미국의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제1차 국제학생전도대회가 열렸다. 18924월 영국에서 SVM이 조직된 이래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 유럽에도 SVM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들은 세계 복음화는 우리 세대에 우리 손으로라는 비전을 가지고 자원해서 선교사로 나갈 것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1930년대까지 지속됐는데, 이중 20,500명의 선교사가 이 운동을 통해 북미에서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학생 스스로 자발적으로 시작된 선교동원 운동이 20세기 초 북미의 선교운동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훗날 SVMYMCA 대학부, YWCA 대학부, 범신학대선교연맹(ISMA), 캐나다범대학선교연맹(ICMA) 등과 함께 세계 선교의 지경을 넓혀 나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마태복음 10:36) 이 말씀으로 그의 길은 분명해졌다. 스터드의 확고한 결심을 알았을 때 어머니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의 남은 여생동안 그를 진심으로 후원하였다.   

 

 

잠시 인도에최종 종착역 아프리카로

 

스터드는 1900년이 되자 인도에서 농장주로 일했던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가족과 함께 인도선교사로 향한다. 심한 천식을 앓았지만 인도 북부 우타카문드 유니언교회에서 목회했다. 여기에서 주로 영국인 농장주들과 영어 사용권 족속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6년 후 다시 본국으로 돌아온다. 영국에 돌아온 그는 순회강연을 계속하였으나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분명한 확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생애에 또 한 번 일대 방향 전환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08년 리버풀에서 그는 식인종은 선교사를 원한다.’는 벽보를 보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것은 칼컴박사 라는 외국인이 붙인 것이었다. 스터드는 그에게서 수십만의 중앙아프리카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 본 일도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상인, 무역상들이 황금을 찾으러 몰려오지만 그리스도를 전하러 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그 순간 그는 부끄러움이 마음 속에 가득찼다.’고 회고하였다.

 

스터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열정적이 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열정은 해가 갈수록 증가되어야 한다.”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겼던 찰스 스터드는 많은 사람들이 쉬고자 하는 50세의 나이에 오히려 그의 생애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 아프리카 선교를 시작하였다.

 

▲ 마지막 사역지 오지 아프리카에서

 

이 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그는 병약하여 의사로부터 그가 아프리카로 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를 받은 데다 재정적인 뒷받침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내 브리스길라도 심장쇠약으로 병 중에 있었기에 의사는 강력히 반대했다.

 

이에 스터드는 깊이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의 응답은 마치 이렇게 들려오는 듯 했다. “네가 가는 것이 어떠냐?” “의사가 가지 못하게 할 겁니다.”라고 고백을 드리니 하나님의 응답은 이러했다. “내가 좋은 의사가 아니더냐? 내가 너와 함께 하지 않겠느냐? 그곳에서도 내가 너를 지켜주지 않겠느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스터드는 황금을 찾기 위해 도박하는 불신자들도 있는데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도박을 하겠다.”며 마침내 아프리카로 가고자 결단한다. 1910년 단신으로 아프리카 정탐 길을 떠났으며 본국으로 돌아와 아프리카 선교중심부’ HAM(Heart of Africa Mission)이라는 선교 후원회를 만들고 스터드는 병으로 쇠약해진 몸으로 53세가 되던 해인 1913년에 후일 그의 사위가 된 알프레드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다. 이것이 ‘WEC 국제선교회의 전신이 되었다.

 

이 때부터 스터드는 18년 동안 아프리카 중심부에 위치한 벨기에령 콩고(옛 자이레공화국)에서 복음 사역을 섬겼다. 몇 년 후에 계속 40여명의 후속 선교사들이 도착했는데 그 중에는 그의 두 딸 에디쓰와 폴린 그리고 사위 알프레드와 노먼 그럽이 함께 동행했다.

 

▲ 스터드는 18년 동안 아프리카 중심부에 위치한 벨기에령 콩고(옛 자이레공화국)에서 복음 사역을 섬겼다    

 

스터드는 영국 최고의 운동선수 출신답게 자기와의 싸움에서 절제하며 열정적이고 쉴 새 없이 일하는 선교사였다. 후일 스터드에 이어 WEC 국제선교회 선장이 된 사위 노먼 그럽은 장인 스터드가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에 대해 그는 휴식도, 오락도, 휴일도 없이 복음전도에만 자신을 통째로 드린 하나님의 종이었다.”라고 술회했다.

 

이렇게 불철주야 노고가 대결실을 맺어 5년 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아프리카 원근 각 처에서 몰려와 매주일 세례를 주어야했고 선교사를 보내주고 교회를 세워 달라는 추장들의 요청이 늘어갔다. 특히 식인종 부족들 가운데 회개 하는 역사가 많았다. 그들은 세례를 받을 때 이렇게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다. “저는 악한 죄인입니다.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는데 아버지가 혼자 먹기 힘들어할까봐 같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들은 사람을 먹을 뿐 아니라 간음을 예사로 하고 이것을 전혀 죄로 생각지 않았다.

 

▲ 스터드는 한결같이 진정으로 열정적이고 쉴 사이 없이 일하는 선교사였다.   

 

 

이와 같이 스터드는 한결같이 진정으로 열정적이고 쉴 사이 없이 일하는 선교사였다. 예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우직하게 황소처럼 일했다. 진흙바닥에 대나무와 풀로 만든 초라한 오두막에서 빛바랜 몇 장의 카키색 담요와 천막용 천으로 만든 베개가 그의 침구였다. ‘질병박물관이라고 표현할 만큼 수많은 병조차도 스터드의 선교 열정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이곳 사람들은 스터드를 브와나 무쿠바’(위대한 하얀 추장)라고 부르며 존경하였다. 마침내 193171671세를 일기로 스터드는 콩고 아밤비에서 지병인 담석증으로 소천하였다. 이 때, 7천명이나 되는 아프리카인들이 장례를 맞이했다.

 

스터드의 영원한 후원자 아내 브리스길라 스튜어트    

여기에서 우리는 스터드 못지않게 그의 부인의 헌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스터드가 중국 오지에서 사역할 때 만난 아일랜드 출신의 처녀 선교사로서 그의 영원한 반려자인 브리스길라 스튜워트는 중국에서 결혼하여 네 딸을 얻게 되는데, 딸들은 전부 선교사와 결혼하여 후에 부친 사역의 충실한 조력자가 된다.

 

스터드가 중부 아프리카 오지의 교회를 지키며 사역할 때 부인은 심한 심장병으로 영국에 남아 있어야 했지만, 그녀는 그 후 20년 동안 남편과 격리되면서도 특유의 사역을 적극 개척했다.

 

그녀는 하루 17시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을 무시하고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하여 세계선교를 위한 수백 명의 자원자를 모집했으며, 그녀의 사위들과 협력하여 남편이 만든 아프리카중심선교회(Heart of Africa Mission; HAM)를 세계복음화십자군(WEC)으로 확대시켰고, 세계적 초교파 선교단체로 성장했다.

 

부인은 스터드가 죽기 2년 전에야 비행기로 아프리카에 날아와 보름을 같이 지낸 후 영국으로 돌아갔는데, 그것이 20년 동안 부부가 함께 한 유일한 기간이었다. WEC의 창설 배후에는 스터드 부부의 이 같은 헌신과 희생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스터드는 죽기 직전에 일생을 회상하면서 자신에게 즐거웠던 일 몇 가지를 열거했는데,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대학을 갓 졸업한 그를 중국으로 부르셨을 때 많은 사람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갔던 일, 둘째 그리스도께서 부자청년에게 명하신 재산을 기쁘게 모두 나누어 준일, 세째 전 세계의 비복음화된 곳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깊이 묵상하고 이 사역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자기 여생을 불사른 일이었다.

 

스터드는 이튼과 케임브리지를 나온 다른 선배나 동기생들의 전례를 좇아 영국의 국회의원이 되고 지도자와 정치가를 추구하는 삶을 살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터드는 세상의 성공적인 길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의 길을 추구했으며, 개척선교사로서 온갖 고난과 질병을 겪으면서 그 누구도 가려 하지 않았던 제3세계의 오지 선교의 길을 활짝 연 선구자였다.

 

스터드는 당시 세계의 가장 힘든 땅이었던 중국, 아프리카, 인도의 오지만 찾아다닌 극히 도전적인 개척선교사의 거인이었다. 스터드는 중국에서 18, 인도에서 6, 그리고 중부 아프리카 오지에서 나머지 18년 여생을 71세로 소천하기까지 선교지의 외로운 교회를 지키면서 온전히 헌신했다.

 

▲ 스터드는 제3세계 백성들의 영혼구원이라는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온전히 투자했고, 영속적인 신령한 열매를 맺는데 성공했다   

스터드는 제3세계 백성들의 영혼구원이라는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온전히 투자했고, 영속적인 신령한 열매를 맺는데 성공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자신과 가족의 돌보지 않고 미친 듯이 뛰었던 스터드라는 한 사람의 비전과 헌신으로 시작된 초교파적 선교단체이자 범세계적 세계복음화십자군’ WEC(Worldwide Evangelization Christ)1982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세계복음화 국제선교회로서 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 International) 단체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2010WEC 국제본부를 영국 런던에서 싱가포르로 옮겨 활동 중심지를 새롭게 하였다.

 

현재 WEC 국제 선교회는 미전도 지역을 중심으로 약 80여 개국에서 사역하고 있으며, 50여 개국에서 모인 2,200여 명의 선교사들이 팀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는 19977WEC 한국본부가 발족되었다.

 

 

WEC 국제 선교회 전략과 지향점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희생’,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거룩한 삶,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교제’. 4대 정신을 바탕으로 선교의 길을 걸어온 WEC 국제선교회가 2013년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2014519일부터 31일까지는 WEC국제선교회의 국제 지도자 회의(인터콘) ‘2014 대회영광스러운 유일한 소망이라는 주제로 송도 한국뉴욕주립대학교에서 은혜 가운데 열렸다.

 

전 세계 230여명의 지도자들이 참석한 대회에서는, 선교 2세기를 맞는 WEC의 미래 방향을 가늠하게 하는 주요 정책들이 결정됐다. 의사 소통과 현지 선교회에서 중심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현재의 영어에서 현지어로 대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선교회 가입을 위한 영어 장벽도 대폭 낮췄다. 비서구권 선교사들의 진입 장벽이 한결 낮아졌고, 미전도종족 선교를 위한 언어 습득을 증진시킨다는 뜻이 담겨 있다.

 

(믿음) 우리는 우리 삶과 사역에 있어 모든 필요의 공급자로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며, 어떠한 반대, 어려움,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타내신 뜻을 이루실 것을 확신한다.

 

(거룩) 우리의 최고의 목적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각, ,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순결한 교회에 의해 영광을 받으시며, 거룩한 삶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문화와 배경에 관계없이 모든 신자에게 경험되어져야만 한다.

 

(희생) 우리는 기꺼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며, 개인적인 안락이나 욕구, 경제적인 안정, 또는 현시대의 사고방식과 생활 수준을 따르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하며, 복음을 위해 멸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하는 제자된 삶의 방식을 받아들인다.

 

(교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통해 연합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에게 복종함을 통해 표현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머리(예수 그리스도), 하나의 교회(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오직 하나의 국적(천국의 시민권)을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활과 직책 임명에 있어서 국가적, 민족적, 교파적, 혹은 기타 다른 편견을 거부한다.

 

WEC가 추구하는 선교사역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식의 문제라고 말한다. 외형을 쫓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붙드는 것이다. 기본에 집중함으로써 쉽게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 WEC가 추구하는 선교사역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식의 문제라고 말한다. 외형을 쫓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붙드는 것이다    

WEC의 선교사역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선교사로 부름 받았음을 확신합니까?

 

그리스도의 사랑과 말씀을 나누기 위해 정말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선교사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준비(WEC 선교회에서 요구하는 훈련을 받을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라는 대모토하에 네가지 특성을 궁극적으로 지향한다.

 

첫째, 미전도 지역을 향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중복 선교를 피하기 위해서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 간다. 아직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지 않고 경작되지 않은 황무지를 향해 지속적인 진출을 모색한다.

 

둘째, 믿음 선교를 한다.

WEC는 하나님께서 부르셨으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는 믿음으로 선교한다. 영적, 육적, 경제적인 도움을 위해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하는 것이다. 특히 재정적인 필요가 생기거나 사역의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엔, 하나님께만 기도하는 것이 원칙이다.

 

셋째, 팀으로 사역한다.

WEC에서는 선교의 부르심 못지않게 WEC으로의 부르심 또한 중요시한다. 단체의 특성상 팀으로 조직되어 생활하고 교제하고 일하기 때문이다. 교육, 훈련, 사역이 모두 팀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다. 국가, 민족, 교파의 다양성을 뛰어넘는 성경적 연합을 추구하는 자세가 사역의 실질적인 원동력이 된다.

 

넷째, 배움이 우선이다.

WEC 선교사가 되려면 2년 정도의 신학과정은 필수이다. 주된 사역이 교회개척이기 때문에 신학적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다. 부부인 경우 두 사람 모두가 그 과정을 마쳐야 한다. 타문화권 훈련과 영어교육과정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으로서 이 모든 교육과 훈련은 뉴질랜드, 네덜란드, 캐나다, 호주, 브라질, 멕시코 소재의 선교사훈련대학(Missionary Training College)에서 이루어진다. http://www.wecinternationa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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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8/16 [22:10]  최종편집: ⓒ womansen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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