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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2.13 [00:13]
사회구제 복음 아닌 영혼복음 ‘불멸의 반석’
<재조명> 6.25 동란후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 ‘그 발자취’(제2부)
 
드보라-사무엘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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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만 그럽은 한국에서는 6·25 전쟁 이후 영적 부흥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이 거듭나 복된 삶을 살고 있다는 보고를 접했기에 한국 선교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스터드가 문을 열고 놀만그럽이 창문을 만들다.

 

▲ 세계기독 선교회(WEC)를 창립한 챨스 스터드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후계자로 놀만 그럽(Norman Grubb)이 제2대 웩 선교회 수장을 끌면서 놀라운 부흥을 선도했다.   

 

세계기독 선교회(WEC)를 창립한 챨스 스터드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후계자로 놀만 그럽(Norman Grubb)이 제2대 웩 선교회 수장을 이끌면서 전 세계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구심점 역할을 맡게 된다.

 

당시 놀만 그럽 회장은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들을 대상으로 우선적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했는데, 한국은 선교지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미 한국은 공관자격으로 1884년에 입국하여 후에 고종이 이름을 지어준 광혜원(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을 설립한 알렌 선교사(미국 북장로교회 소속)를 시작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대거 파송되어 기독교가 크게 부흥되고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놀만 그럽은 한국에서는 6·25 전쟁 이후 영적 부흥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이 거듭나 복된 삶을 살고 있다는 보고를 접했기에 한국 선교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놀만 그럽 회장에게 충격을 주었던 일이 발생했다.

 

놀만 그럽과 아내 파우라인(Pauline)

19548, 놀만 그럽은 웩 선교회의 중요 선교지 중 하나인 일본 도쿄(東京)에 왔다가 일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동경의 하네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마침 한국의 대구 주암산 기도원 등 한국의 여러 교회에 집회 강사로 초청받은 제이 짤비스 박사(미국 침례교 소속, 청소년 선교로 유명)를 만나게 되었다. 서로는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상대방을 알아보고는 매우 반가워했다.

 

놀만 그럽! 당신은 한국에 가 본 일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왜 세계 도처에 많은 선교사를 보내면서 한국에는 보내지 않습니까?”

 

한국은 매일 새벽 기도회를 하면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데, 굳이 선교사를 보낼 필요가 있습니까?” “하지만 한국은 소문하고는 다른 것 같습니다.”

 

결국 놀만 그럽 회장은 짤비스 박사의 권유에 따라 영국에 일정 변경을 통보하고 19548월 한국을 처음으로 찾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대구 주암산 기도원에서 산상 부흥회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깜짝 놀랐다.

 

한국 민족은 정말 열심이 있는 민족이구나라고 생각한 놀만 그럽 회장은 저녁 집회 특별 강사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삶에 대해 말씀을 전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는 것이 아닌가! 전 세계를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해왔던 놀만 그럽 회장으로서는 초유의 일이었다.

 

행여 통역이 잘못되었는가 생각했지만 통역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말씀에 젖지 못하는 참석자들의 모습에 당황하던 놀만 그럽 회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흘 째 되는 날 강대상 위에 올라가 질문을 던졌다.

 

한국의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저녁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모든 죄를 씻음 받고 확실하게 의인으로 거듭나신 분이 있다면 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지더니,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주위를 살피며 손을 들었다가는 금방 내려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던 놀만 그럽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그렇다면 한국의 이 많은 교인들이 거듭나지도 못한 채 열심만 내고 있었단 말인가! 이것이 정말 사실이란 말인가?”

 

마르틴 루터, 존 웨슬리, 찰스 스펄전 등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죄로 인해 고통하며 죄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지만 해결하지 못한 채 절망 속에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영원한 속죄의 복음으로 단번에 죄 사함과 거듭남을 체험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서는 복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남을 체험한 선진 복음주의자들의 동일한 복음 간증을 일절 발견할 수 없었다. 복음과 상관없이 열심만 내는 외형적 기독교인들의 모습! 이것이 세계 최대의 선교 단체 중 하나인 웩 선교회 회장 놀만 그럽의 눈에 비친 한국 교회의 영적 실상이었던 것이다.

 

그때 놀만 그럽은 당시 집회에 모인 한국 교인들 대부분이 기독교 신앙의 기본인 거듭남이나 구원의 믿음에는 관심이 없이, 인간의 열심과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이는 한국 교회가 전통 복음주의가 아닌, 현대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아 시작됐기 때문으로 봤다.

 

 

오지에서 함께한 여호수아와 갈렙

 

하나님, 한국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참된 복음으로 구원하소서! 한국에 진정으로 거듭난 당신의 종을 허락하소서!” 한국인도 아니면서 한국을 위해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던 놀만 그럽!

  

WEC는 한국에 1956년 최초의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1954년 늦여름! 큰 충격 속에 한국에서 영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놀만은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교회와 한국의 기독교인들, 그리고 한국 민족을 위한 애절한 기도였다.

 

한국 교회의 실상을 직접 보면서 받은 충격은 놀만 그럽 회장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을 다녀간 이후 그는 한국을 잊을 수 없었다. 그토록 열심히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면서도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교인들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선하게 아른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의 한 큰 교회 초청설교에 나선 놀만 그럽은 설교 전에 자기 선교회 소속으로 선교훈련을 받고 있던 한 학생에게 간증을 시켰다. 웩 선교회는 영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자원하는 선교사들을 모집하여 2년 정도 훈련한 후 세계 곳곳으로 파송했다.

 

키스 글라스(KEES GLAS, 한국명 길기수) 선교사는 청소년기에 구원을 받고, 나 혼자 이 복음을 간직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선교사를 지원했으며, 그는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트레이닝 센터(Glasgow Training Centre)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고 있었다.

 

키스 글라스는 그날 저녁 이렇게 신앙 고백을 했다. “저는 네덜란드에서 개혁 장로교회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열심을 냈지만, 자라면서 짓는 죄 때문에 고민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제게 거듭난 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분은 미션 스쿨 교장으로 제게 복음을 전해주셨는데, 그때 제 모든 죄를 해결 받고 저도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제 마음에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 웩 선교회에 선교 지망을 했고, 지금은 네팔에 선교를 떠나기 위해 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WEC가 자체 발간한 19675-6월호     

 

키스 글라스의 간증에 놀만은 ! 이 사람이면 한국에 가서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고,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간절하던 놀만 그럽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간증이 끝난 후 강단에 서자마자 놀만 그럽 회장은 지금 간증한 학생은 네팔이 아닌 한국으로 갈 것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했고, 그때 케이스 글라스 학생은 물론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얼마 후 네팔 정부가 공산주의를 채택하면서 케이스 글라스의 비자를 거부했고, 그 후 케이스 글라스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한국의 첫 웩 선교사로 1956년에 한국에 발을 내딛게 된다.

 

1956년 처음으로 한국에 파송하여 1975년까지 한국에서 선교를 한 키스 글라스(Kees Glas, 한국명 길기수) 선교사를 통해 태동된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 키스 글라스 선교사의 파견 소식을 알린 1957년도 WEC잡지 3,4월호 기사   

 

키스 글라스는 1956년에 미혼 상태로 한국에 들어온 케이스 글라스는 경북 선산읍 장로교회 문덕무 장로 집에 기거하면서 한국말을 배우며 1년간 전도했다.

 

그 후 키스 글라스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사인 라이스(한국명 나의수) 선교사가 대구 남산동에 창립한 부흥협회 총무로 일하며 산하에 승리의 생활사, 기독서회, 주암산 기도원, 고아원 등을 운영했다. 부흥협회는 대구 남산동의 큰 건물에 본부를 두고 초교파적으로 선교를 지원하는 단체로써 승리의 생활월간지와 다량의 전도지를 배포했고 기독서회에서는 많은 양의 복음적 서적들을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그 때 키스 글라스 선교사는 대구에서 결혼했다.

 

라이스 선교사는 1959326CBS 대구 기독교 방송국 개국한 추진위원으로 참여한 전력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1963, ‘승리의 생활설립자였던 나의수 선교사는 집에 들어온 도둑을 위협하려고 엽총을 들이 댔으나 실수로 살해하여 한국에서 추방당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부흥협회는 결국 문을 닫았다.

 

하지만 라이스 선교사의 적극 권유로 키스 글라스 선교사와 우종학(당시 팀선교부 산하의 부산 축복산 고아원의 총무)19674월 승리의 생활지를 재발간하게 됐고 사무실을 대구에서 대전으로 옮기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불모지 한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키스 글라스의 든든한 사역자로서 딕욕(Dick York)이라는 또 한명의 위대한 인물을 살펴보아야 한다.

 

 

키스 글라스의 든든한 사역자 딕욕

 

킹제임스 성경을 신뢰하는 딕욕(Dick York) 선교사는 캐나다에서 자랐는데 그 어머니가 14살 때 영국 침례교에서 거듭 난 후 40년 이상을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면서 두 아들을 길렀다.

 

잠시 딕욕의 성장 과정과 그리스도께 헌신의 과정을 추적하지 않을 수 없다. 딕욕은 1928년 워싱턴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딕욕은 4살 때 미망인 어머니와 형님, 누님과 함께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 딕이 15살 되던 해 어머니가 그를 미 해병대 수송선에서 일하도록 주선하면서 다시 시애틀로 돌아갔다.

 

그러나 경건한 가정에서 떠나 살게 된 딕은 어머니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하는 흐트러진 자세로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것에 휩싸여 탕자처럼 허송생활에 몰두했다. 딕욕은 다시 1950년 밴쿠버로 돌아왔다. 그 때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딕의 형은 종교적으로는 꽤 열심 있는 기독교인이었으나 구원을 받지 못하다가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큰 교회의 청년회장 직분을 맡고 있던 중 구원을 받았는데, 이 후 딕의 형은 목사가 된다. 형의 전도로 딕은 1950111일 새벽 430, 딕의 나이 21세 때 구원을 받는다. 구원받을 당시 딕은 대형트럭에 자동차를 싣고 미 대륙을 행단하며 자동차 판매 사업을 하던 때였다.

 

▲ 불모지 한국에 복음 씨앗을 뿌린 키스 글라스의 든든한 사역자로서 딕욕(Dick York)이라는 또 한명의 위대한 인물

 

다섯 살 위인 형은 마치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 딕에게 주님께 인도해 복음을 전했던 열매로 인해 탕자의 길을 벗어나게 하여 동생을 다시 얻게 된 것이다. 형은 딕을 견고하게 설 수 있도록 해 줬는데 첫 질문으로 ! 네가 온전하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딕도 그렇다!”고 화답을 했다.

 

그러자 둘째 질문으로 ! 네가 모든 선한 일에 철저하게 준비되기를 바라느냐?”고 또 물었다. 딕도 물론!’이라고 힘주어 대답했다. 이에 형은 다음의 성경 말씀으로 딕을 북돋는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디모데후서 3:16-17)

 

딕의 형은 하나님의 말씀은 너를 온전하게 할 것이며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준비하게 할 것이니 매일 매일 이 성경을 읽고 네 평생 동안 읽어라. 그것이 너를 못 박아 줄 것이라고 권면한다. 그 날로부터 딕은 기계적이라고 할 만큼 성경을 탐독하며 묵상하면서 어디에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자기 옛 생활처럼 지내는 술주정뱅이, 마약 중독자, 방랑자들에게 집중한 것이다.

 

딕욕은 이 년 후, 미국 오레곤(Oregon)주 유진(Eugene)시로 와서 술, 마약으로 폐인이 된 사람들을 상대로 사역하는 믿음의방패선교회를 시작하면서 거리를 방황하는 떠돌이 노동자들을 위해 짐을 졌다. 동시에 복음 방송 설교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참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힘을 주었다.

 

딕욕은 1956년 밴쿠버의 다린과 결혼했다. 딕욕과 다린은 특히 해외로 복음을 전파하고 선교훈련프로그램을 설립했는데 그 이후 몇몇 나라에서 주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큰 임무를 준비하는 일에 주님에 의해 사용되어졌다.

 

 

딕욕을 적극 후원한 비범한 인물 홀트

 

 

▲ 해리 홀트’(Herry Holt)로서 전쟁으로 황폐된 한국에서 많은 고아들과 혼혈아들을 미국으로 입양해 드리는 홀트 아동 복지회를 세운 사람이다. 홀트는 딕욕을 적극 후원하였다.


바로 앞서 언급된 방송 청취자들 중에 매우 부요한 농부로서 큰 사업을 하는 사업가가 방송을 듣고 딕과 친분이 두터워지며 백방으로 딕의 후원자가 돼 주었다
. 바로 이 사람이 해리 홀트’(Herry Holt)로서 전쟁으로 황폐된 한국에서 많은 고아들과 혼혈아들을 미국으로 입양해 드리는 홀트 아동 복지회를 세운 사람이다.(www.holt.or.kr)

 

   

 

그 때 딕의 나이는 25, 홀트의 50여세였다. 홀트는 딕에게 한국에 나가 복음을 전하자고 여러 차례 권했으나 이에 대해 딕은 한국은 유래 없이 복음이 잘 전해진다고 신문, 잡지에도 기사화 됐고 빌리 그레햄도 한국을 놀랍게 복음이 전해지는 나라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내가 왜 한국에 복음을 전하러 가느냐? 만약 내가 선교사로 나가게 된다면 브라질로 가겠다고 하며 거절했다.

 

하지만 홀트는 포기하지 않고 한국에 기독교인들은 많으나 구원받은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며 2개월만 한국에 같이 나가보자고 끝까지 강권했다.

 

홀트의 권유를 받아들인 딕은 19562개월 일정으로 홀트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한국의 대도시는 물론 작은 시골마을과 심지어 울릉도까지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약3개월 동안 집회도 하고 개인상담하면서 사실여부를 확인해 보고 홀트에게 한국 기독교인들은 신실하나 믿음은 모래성이라는 말을 전했다.

 

1955년 아내와 함께 8명의 한국 고아를 안고 미국에 도착하다.   


 

특히 한국에서 딕욕은 평소 잘 알고 지내는 미국인 선교사의 초청을 받아 새문안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기회를 갖게 되는데, 그때 그 역시 한국 교회의 실상을 발견하고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딕욕은 다음의 글을 남겼다.

1958

宣敎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이

브라질로 가고 싶었는데

한국으로

물질이 必要했는데 대신 배고픔을 주셨다.

 

宣敎의 첫 시도, 첫 발은

은 내게 없지만으로 福音을 땅끝까지

빌리 그레함에게 들은바에 의하면 한국은 基督敎 국가인데

왜 또 선교사가 가야하는지?

정작 와서 보니 한국은 基督敎 국가가 아니더라.

 

결국 딕은 한국에 복음이 없다고 결론 내리고 미국으로 돌아가 자신이 시무했던 미국 교회에 한국 선교사로 나가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미국교회에서는 딕이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만류하면서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겠다는 말뿐이었다.

 

19584, 딕은 미국 교회의 반대를 뒤로 하고 한국선교사로서 미국을 떠날 굳은 결심을 할 당시 한국에 구원받은 사람 12명을 훈련시켜 놓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서원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런 후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여 놓은 후 비행기 삯을 구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었을 때 비행기 출발 이틀 전 자신의 사서함에서 누군가 편지와 함께 돈을 넣어놓은 것을 발견한다.

 

우체국 직원에게 하나님을 살아계신다고 간증하여 우체국 직원도 구원을 받고 딕은 그의 부인과 두 아들을 동반하여 다시 한국 선교사로 들어오게 됐다. 그가 김포공항에 내렸을 때 그의 손에는 겨우 14불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딕은 한국에 나와 포항에서 1년 반을 거주했는데, 딕이 포항에 거주하게 된 이유는 딕의 제자 중 하나가 포항에 있는 미군 헬기장에 근무 중으로 딕에게 한국에 오면 포항으로 찾아오면 자신이 기거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포항 거주 당시 포항에 있는 제자에 의해 미 공군부대 군목으로 설교하면서 포항에 홀트가 땅을 구입해 줘서 선교학교 건축을 진행했다. 미군의 협조에 의해 모래, 자갈을 실어다 나를 수 있었는데, 한국의 매장 문화를 모르는 미군들에 의해 무덤이 훼손되기도 했으나 동네 주민들은 6.25 직후여서 미군의 행동에 함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가 지어진다는 말을 듣고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그래서 딕은 동네 주민들의 반발을 겪자 결국 포기하고 대구로 올라갔다.

 

 

영국의 '초교파 선교학교' 한국에 재현하다.

 

 

영국만큼 복음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고, 영국만큼 복음의 종들이 많이 일어났던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영국은 역사상 세계적으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낸 분야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것은 복음의 역사와 관련된 분야였다.

 

영국만큼 복음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고, 영국만큼 복음의 종들이 많이 일어났던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청교도들과 킹 제임스 성경의 탄생, 그리고 성서공회의 창설은 영국이 복음 역사의 중심에 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복음의 축복을 받았다. 그 기간 동안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으며, 수많은 선교사들이 세계 각지로 파송되었다. 당시 세계 선교사의 80% 이상이 영국과 미국에서 보낸 선교사들이었다고 하니 가히 영국은 복음과 선교의 나라종주국이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진다는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와 옥외 설교의 대가로 알려진 죠지 휫트필드, ‘설교의 황제로 불리던 챨스 스펄젼과 기도의 사람으로 유명한 죠지 뮬러가 익히 회자된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학생 복음 운동의 효시인 세계 십자군 선교회(WEC)’ 창시자 챨스 스터드와 그의 사위 놀만 그럽 또한 독보적이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성경을 44개국의 언어로 번역한 윌리암 캐리,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리빙스턴,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암 부스 등 수 많은 복음의 종들이 영국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당시 선교사들은 기존 한국의 신학교와는 전혀 다른 전도자 훈련을 학생들에게 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무디와 스펄전, 허드슨 테일러 등 19세기의 복음의 역사를 주도한 전도자들의 영향을 받은 챨스 스터드와 놀만 그럽이 이끈 WEC 선교회 선교사들이 이들과 동일한 성령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스펄 전과 무디! 이 두 사람은 기존 신학교를 다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들을 훈련하는 교육 기관을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스펄젼의 목회자대학(The Pastors College)과 무디성서학원(Moody Bible Institute)이다. 이 두 학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각각 유럽과 미국에서 최고의 복음적인 학교로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이들이 설립한 교육기관은 기존 신학교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영이 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학생들의 입학 조건이었다. “타고난 재질과 능력이 어떠하든 중생의 체험과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다면, 누구든지 복음 전도자의 일에 손을 댈 자격이 없다.”(챨스 스펄젼의 목회자후보생들에게’)

 

1962년 딕욕의 주도로 설립된 초교파 선교학교   

 

스펄젼과 무디 모두 학생들을 선별하는 가장 큰 조건으로 분명히 거듭나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느냐는 것이다.

 

성경 자체를 읽으십시오. 만일 음식을 먹기보다 그것의 화학 성분을 연구하는데 시간을 보내면 곧 굻어죽을 것입니다.”(디엘 무디)

 

기존 신학교들이 교리적 측면에 치중한데 비해 스펄젼의 목회자학교나 무디의 성서학원 모두 학생들이 성경 자체를 배우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성경의 중요성을 그들 자신이 깊이 깨닫고 늘 설교해왔기에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신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주위 사람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기존 신학 교육을 거부한 채 성령의 인도를 따라 복음과 성경 말씀만으로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일으켰다. 이들의 신앙관과 복음의 역사는 후에 거듭난 하나님의 종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 흐름이 그대로 딕욕과 키스 글라스 선교사들이 세운 선교학교로 이어진 것이다.

 

 

언어의 장벽과 교파의 허식을 뛰어넘다,

 

케이스 글라스는 한국 교회가 자신이 거듭나지 못하고 열심히만 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임을 알아차리고 한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고 십일조를 내고 주일을 지키는 것으로만 천국에 간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새 생명 탄생은 지난한 일이었다.

 

앞서 상술한바, 한국에 최초로 파견된 미국 선교사들 대부분은 미국을 장악한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현대 복음주의 교회들이 보낸 선교사들이었다. 그렇기에 선교사들은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보다는 병원이나 대학을 세우는 등 사회 사업에 치중했다. 당시는 자유주의 신학이 사회복음주의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 개혁에 중점을 두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또한 딕 욕이 믿음의 방패 선교회를 설립한 1953년은 한국 전쟁이 끝나는 해였다. 1950625일에 발발하여 1953717일 휴전한 3년간의 한국 전쟁으로 인해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들 중 하나였다. 전쟁 후 수많은 거지들과 전쟁 고아들이 생겨났는데, 그때 한국 교회는 외국인 선교 단체들의 지원을 받아 이들을 위한 구호 활동에 주력했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심리에 교회는 봉사 활동을 하는 단체로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곳이라는 관념이 생기게 되었고, 그 관념이 전쟁 후 절대적인 빈곤에 몰린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교회를 찾도록 이끌었다. 그러한 현상은 외형적으로는 큰 부흥처럼 보였기에 한국에 성령의 역사가 힘 있게 일어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거듭난 하나님의 종들의 눈에는 안타깝게 보일 뿐이었다.

 

이들은 1950년대 말부터 각자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지만 많은 사람이 구원받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한국에 와 있던 몇몇 선교사들이 이러한 사실에 공감하고 자주 만나 한국을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 한국을 위해 거듭난 현지 전도자가 꼭 필요합니다. 그들을 위한 선교학교를 도우소서.”

 

1962년 말의 어느 날, 대구시 중구 삼덕동에 위치한 내인병원 2층 집에서 케이스 글라스, 데릭 얼(Derek Earl, 한국명 원대역), 딕 욕(Dick York), 말론 베이커(Marlin Baker), 해리 와이먼(Harry Wyman) 등 거듭난 선교사들이 1주일 동안 금식 기도회를 가졌다. 그 집은 놀만 그럽 회장이 두 번째로 한국에 파송한 웩 선교사 데릭 얼의 집으로, 한국의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소명을 위해 모인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처음에는 한국 교회에 속해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교파와 교리 중심의 한국 교회의 장벽으로 인한 복음 전도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한국인 전도자가 이끄는 거듭난 교회의 필요성을 공감한다. 결국, 그들은 함께 금식 기도회를 가지면서 한국인 전도자를 양성하는 선교학교를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웩 선교회 소속의 데릭 얼과 케이스 글라스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선교회에 소속 되어 있었지만, 한국에 참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부분에는 마음을 같이하는 거듭난 선교사들이었다.

 

한편, 영국의 원대혁(Derek Earl) 선교사님은 1963, (WEC)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나와 1964년에 한국 어린이 전도를 목적으로 활동하던 독일 왝 선교부 소속 여선교사와 결혼하여 1964년 후반, 강원도 삼척으로 선교활동을 위해 들어갔다. 1971까지 한국에서 WEC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선교활동을 했으며, 이후 파독 한국 간호원들과 교포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현재는 영국의 Swanseawales Bible College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

 

이들은 딕욕 선교사는 4.19 혁명 직후에는 대구 YMCA 홀을 매주 토요일마다 빌려 집회를 하며 복음을 전하던 중 1961년 자신의 집에서 성경을 배우며 모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들은 언어와 기존 교파에 장벽을 통감하고 한국인 전도자 양성에 초점을 두기 시작했다.

 

구원은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마음 선행돼야

 

씨를 뿌리는 것이 거두는 것보다 중요하다. 요리사는 정원에 나가서 누군가가 씨를 심어놓은 결과를 가져다가 요리하는 것이다. 선교사는 씨를 심고 요리는 제자들이, 선교사의 할 일은 제자들을 양성하는 것이다.”(1958년 딕욕 선교사 일기중)

 

선교학교의 시작 배경의 또 하나는 미국 정통복음주의 선교사인 말론 베이크가 서울에서 건물을 임대하여 창녀들을 모아 먹여주고 재워주며 편물, 미용, 양장기술을 가르쳐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자는 취지로 시작하였으나 이 여성들이 불과 한 두 달 만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버려 베이크는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이 때 딕을 만난 베이크는 딕의 권유로 사용하던 집기들을 가지고 대구로 왔고 이로 인해 대구선교학교 시작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형제교회 및 장로교단의 조력 하에 마음을 같이하여 젊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대구 삼덕동에 있는 오래된 일식집을 빌려 믿음의 방패 선교학교’(Shield of Faith Mission)라는 이름의 선교학교를 세웠는데, 딕 욕 선교사가 그 선교학교의 책임을 맡게 된다.

 

선교학교는 1962년 거듭난 성도 1기생 12명을 받으면서 학생들의 신앙훈련을 시작했다. 이듬 해 196311월에는 선교학교 2기생으로 9명을 모집했다. 한국에서 이들 사역은 1956~1964년 사이 사막을 옥토로 변화시켜 복음의 씨앗을 뿌린 시기로 평가된다. 이 시기에 본격 한국에 정통적인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한편 딕 욕 선교사를 통역하던 한 인물이 1965, 인천 국제복음방송국(후에 극동방송국으로 개칭) 총무부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인 사역자를 연결하면서 다리를 놓았다. 매일 이른 새벽에 20분간의 은혜의 아침이란 코너를 맡아 방송설교를 했는데 방송을 듣는 청취자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복음의 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때 선교학교로 사용하던 집은 일본식 큰 저택이어서 딕욕 선교사 가족과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이론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을 철저히 배제한 채 실제적인 믿음의 훈련을 받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구하여 얻는 것이 생활의 철칙이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마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절대 사람에게 구하거나 암시도 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구하여 얻으라.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만 의지해야 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둘째로 주목되는 부분은, 교육의 초점이 성경 말씀 자체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 선교학교의 유일한 과목은 성경 밖에 없었다. 그래서 비록 선교학생들 대부분이 나이가 어렸지만, 그들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성경 말씀에 능통하고 깊이 있는 선교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놀라곤 했다.

 

마지막으로 선교학생들이 개인적으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여 구원의 믿음을 얻게 하는 복음 전도였다. 개인의 믿음 상태(구원의 확신과 중생 여부)가 어떠하든지 사람들을 교회로 많이 이끌면 전도를 잘하는 것이고, 교인 수가 늘어나면 부흥되는 교회로 여겼다.

 

하지만 당시 선교사들은, 대부분 형식적인 교회에 속해 믿음 없이 살다가 거듭난 전도자들과의 신앙 상담을 통해 참된 믿음을 얻고 거듭남을 체험했기에 한국 교회와 교인들의 영적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기에 기존 전도 방식이 아닌, 차원이 다른 실제적 복음 전도를 훈련시켰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선교학생들을 통해 불신자는 물론 다양한 계층의 교인들이 새롭게 구원의 확신을 얻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어도 죄와 사망 가운데 고통하다가 참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얻은 믿음과 그로 인한 기쁨을 고백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기존 전도 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 교회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특이한 현상이었다.

 

▲ 1963년 맥카피 선교사 가족    

 

부언하면, 1969년 경기도 오산 브래드린 교회의 맥카피 선교 또한 이들과 인연이 닿아 적지 않은 활력이 되었다. 미국 캔자스 출신의 건축 맥카피는 19604월 홀트아동복지재단과 미션스쿨 경남 거창고교 교사 신축을 위해 입국한 후 한국 선교에 힘썼다.

 

미국 선교기관 지원으로 한국기독교선교회를 설립, 평택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다. 영농 축산 의료 복지 등의 분야에서 헌신했으며 63년 거창고교, 65년 엠마오통신학교, 68년 용인 남사중학교, 72년 오산기독병원을 각각 설립했다. 이러한 공로로 78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그러나 79년 건강 악화로 한국을 떠나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선교회 후대들은 전국에 200여 교회를 개척했다.

 

믿음의 방패 선교단    

 

 

2012년 믿음의방패선교회 선교학교 출신 재회모임    

 

현재, 키스 글라스는 네덜란드에 거주하고 있으며, 딕욕과 다린의 가족은 6명의 아들과 17명의 손자와 5명의 증손자를 두었다. 지금 그들은 미국 오레곤주 벤드에 살고 있다. 그는 그 곳에서 믿음의방패선교회선교학교의 학생을 가르치며 다른 도시들과 나라들로 세미나와 집회강사로 또 현지 선교사를 격려하는 일을 하고 있다.(Shield of Faith Mission Int. P.O. Box 144 Bend, Oregon 97709 USA)(http://www.sfmiusa.org)

 

2016년 딕욕이 한국에 보내온 서신 일부를 전언한다. 당신의 메일에 이런 답변을 하게 되어 괴롭습니다. 제 아내의 건강이 안 좋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내를 두고 떠나는 것은 현명치 못한 것 같습니다. 저는 저희 두 부부가 80살이 훨씬 넘어섰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저는 90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어요.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점점 더 많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부디 제가 이 집회를 취소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풍부한 사랑으로 딕욕 드림.

(I am distressed to write this response to your email. My wife's health is not good.

I realize that we are both well over eightPlease forgive me for canceling. Let me know if there is anything Ican do to be a blessing. Much love in Christ, Dick.)

 

 

▲ (WEC) 선교회에서 키스 글라스 선교사의 친구로 함께 훈련을 받았던 오픈 도어’(open doors) 설립자인 브라더 앤드류(Brother Andrew)    

 

 

키스 글라스의 공산권 동역자들

 

(WEC) 선교회에서 키스 글라스 선교사의 친구로 함께 훈련을 받았던 오픈 도어’(open doors) 설립자인 브라더 앤드류(Brother Andrew)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1955년 설립한 오픈도어선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여러 가지 제한과 박해 아래 사는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를 강하게 하고, 세워주고, 세계복음화에 참여하도록 격려하는 선교회이다.

 

▲ 복음은 철의 장막을 뚫고라는 책의 저자이며, 공산화된 동유럽에 1955년부터 선교를 시작하여 복음의 밀수꾼으로 유명한 브라더 앤드류 역시 키스 글라스와 함께 웩 선교회 글래스고 트레이닝 센터에서 19539월부터 과정을 이수했다.   


 

복음은 철의 장막을 뚫고라는 책의 저자이며, 공산화된 동유럽에 1955년부터 선교를 시작하여 복음의 밀수꾼으로 유명한 브라더 앤드류 역시 키스 글라스와 함께 웩 선교회 글래스고 트레이닝 센터에서 19539월부터 과정을 이수했다.(In September 1953, Brother Andrew started his studies at the WEC Glasgow bible college.At Glasgow bible college Christians could be trained up for mission in 2 years.)

 

▲ 그는 유고슬라비아뿐만 아니라 북한에도 성경을 반입하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힘껏 발휘했다 

브라더 앤드류는 이데올로기 냉전이 극에 달했던 1950년대부터 동구권의 공산국가들에 잠입하여 성경을 전달하고 지하교회를 독려하던 목숨을 건 복음의 밀수꾼이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뿐만 아니라 북한에도 성경을 반입하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힘껏 발휘했다.

 

엔드류는 1928년 네덜란드에서 귀머거리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 사이에서 여섯째 중 셋째로 빈한한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심한 장애를 앓고 있는 맏형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무자비한 훈련을 즐겼던 난폭한 특공대원으로서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용맹스럽게 전투를 벌였던 브라더 앤드류는 다리에 부상을 입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 말보다 행동이 먼저 앞서는 그의 기질대로 항상 몸으로 실천하는 믿음의 용사가 되었다.

 

하나님은 브라더 앤드류라는 한 믿음의 용사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다. 앤드류의 오픈도어선교회(open doors)가 간절히 기도하며 전도했을 때 마침내 전 세계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여리고 성처럼 단번에 무너진 것이다.

 

공산세계가 붕괴된 후 브라더 앤드류는 이슬람 선교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로 인해 브라더 앤드류는 현존하는 인물이면서도 ‘20세기의 사도 바울이라 일컬음을 받는다.https://www.opendoorsusa.org

 

 

▲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아시아의 모든 공산국가에 복음을 전한 김기성(Ki Sung Kim)이 출간한 광야에서의 검(a Sword in the wilderness)에서도 키스 글라스의 이름이 거론된다   

 

 

 

     

이외에도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아시아의 모든 공산국가에 복음을 전한 김기성(Ki Sung Kim)이 출간한 광야에서의 검(a Sword in the wilderness)에서도 키스 글라스의 이름이 거론된다.

 

 

3세계에 구원의 복음을 새롭게 뿌리다.

 

스터드를 이어 1931년부터 웩 국제총재(1931-1965)를 지낸 노만 그럽은 1993121598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현재 웩 선교회 본부는 영국 런던에서 옥스포드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까지 19세기 영국과 미국을 강타한 영적 쇄신과 영적혁명의 큰 물줄기의 연원과 추적을 통해 그리스도의 숨결을 상세하게 재조명한바, 성령으로 인도되어 스터드와 놀만의 헌신을 통해 초교파적으로 양육되어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1960년대 한국에 전한 복음은 치열하고 정결한 것이었다. 한국내의 비우호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사명의 '참생명의 씨앗'을 이 땅에 뿌리내린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관여 없이는 이루질 못할 대각성이었다.

 

이후 한 세대가 흘러 1997년 한국에서는 WEC 한국본부가 발족되었다. 이제 지난 세대의 역사적 복원에 따른 간격을 메우는 것은 이들뿐만 아니라 후대들의 몫이다. 하나님의 바이블 시간표가 이제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을 깨어있는 선지자들이라면 넘치도록 알고 있을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귀환하면서 모두가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에 하나님이 섭리를 강하게 감지했을 것이다. WEC 국제선교회가 아래와 같은 새로운 선교혁명의 비전을 혁신하는 과정에서 WEC 한국본부가 성령이 이끈 한국 복음 현대사의 복원을 시동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여 성령께서 너무 기뻐하실 일이다.

 

WEC 국제선교회는 국제본부 차원에서 지난 100년간 이어진 선교회의 조직체계 개편을 마무리 지었다. 급변하는 선교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한 조직으로 거듭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 놀만그럽을 선교반석에 놓은 든든한 후원자  아내 파우라인    

WEC는 현재 영국 프랑스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을 비롯한 17개국에 파송본부를 두고 있으며 중동과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 7개 권역에 22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조직 개편은 미전도 종족 복음화’ ‘교회 개척’ ‘선교 동원이라는 WEC의 핵심 목표를 최대한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특히 선교지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이 간소화되고 현지 사역팀의 자율권이 확대될 예정이다.

 

또한 WEC에서 40% 정도를 차지하는 비서구권 선교사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WEC 한국본부는 캠퍼스 선교단체 등과 협력해 선교지에 보낼 수 있는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젊은 선교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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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8/20 [22:13]  최종편집: ⓒ womansen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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