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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2.13 [00:13]
한눈에 반한 뜨거운 사랑…가슴에 상처만
<정성수 칼럼> 근대 문인들의 ‘러브스토리’
 
정성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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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수 시인   

 

 

이성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 사랑이다. 그리스어로 에로스·필리아·아가페로 표현되는 사랑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 끝이다. 문인이 붓을 들게 만드는 것도 사랑이요. 붓을 내려놓게 하는 것도 사랑이다

 

에로스(Erō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으로 로마 신화의 큐피드또는 아모르에 해당한다. 인간이 지상에서 생존하고 있는 한 신적인 것과의 일체화를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망아황홀(忘我恍惚)을 계속 구가하면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죽음과 만나게 된다.

 

필리아(Philia)’는 친구나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사회적 공감이나 교감 따위를 말한다. 이기적인 사랑으로 영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뜻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 악인까지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신이 아닌 이상 인류를 평등하게 사랑하기는 불가능하다. 위선에 빠지지 않는 사랑은 자기애적인 에로스뿐이며 필리아는 에로스적 요소를 잃는 정도에 따라 위선적인 사랑에 빠지기 쉽다. 필리아적 사랑은 아가페와 에로스의 양 극단을 오가게 된다.

 

아가페(Agapē)는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으로 무조건적 사랑을 대표한다. 에로스적인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융합도 실체적 합일도 일어날 수 없다. 다만 신과 인간의 교제가 있을 뿐 사람과 사람 간의 독립적 존재를 바탕에 둔 사랑이다.

 

 

문단에서 최초로 염문 춘원 이광수

  

우리 문단에서 최초로 염문을 뿌린 문인은 춘원 이광수(1892~1950). 미남에 지성을 갖춘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 중이던 이광수는 고향 평안도 정주군에 아내가 있었지만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허영숙을 만나 첫눈에 반했다.

 

이광수와 허영숙이 죽고 못 살던 시기에 미술학교에 다니는 나혜석이 이광수 앞에 나타났다. 나혜석의 등장으로 이광수와 허영숙의 사이는 소원해졌다. 나혜석은 적극적인 성격으로 이광수에게 결혼을 요구했다. 이 무렵 이광수와의 소문을 들은 나혜석의 오빠가 일본으로 건너 와 나혜석을 데리고 가버렸다.

 

이광수와 허영숙은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여 이광수는 언론인으로 허영숙은 의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광수가 폐결핵에 걸려 허영숙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면서 둘은 다시 불붙었다. 이광수는 본부인과 이혼한 뒤 1923년 허영숙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광수는 625전쟁 때 서울에 있다가 북괴군에게 납북되어 평양에서 폐결핵이 악화되어 숨졌다.

 

반봉건 사상선봉, 양주동 박사

 

▲ 양주동   

양주동(19031977)은 본관은 남해(南海)호는 무애(无涯)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을 해독했다. 19233, 일본 와세다 대학 예과졸업생 양주동이 고향 장연으로 돌아와 반봉건사상을 외치며 강연하던 시절에 문학도 강경애를 만났다.

 

금성지(金星誌)’기자이기도 한 양주동과 17세의 동덕여고 학생 강경애는 동거를 시작했다. 물론 양주동은 이미 처자식이 있었다.

 

양주동과 1년간 동거한 강경애는 여성들에게 봉건적인 생활태도와 종교생활을 강요하는 학교교육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에 가담하였다.

 

 

강경애

이 일은 평양 숭의여학교를 퇴학하는 계가가 되었다. 양주동은 시를 즐기는 강경애에게 소설을 쓰도록 권했다고 한다. 어느 날 강경애의 형부가 찾아와 강경애를 고향으로 데려갔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양주동은 강경애와 헤어졌다.

 

그 후 강경애는 1931년 결혼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 뒤 중앙 문단에 시를 자주 발표하여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필명이 가마(珂瑪)인 강경애는 소설에서 사회경제적 모순을 작품의 기본적인 갈등구조로 삼아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로 인해서 문학사적으로 과소평가되어 왔다. 1980년대 이후에야 진보적 사실주의 작품으로 재평가하기에 이르렀다.

 

 

메밀 꽃 필 무렵의 이효석

 

 

▲ 왕수복  

소설가이며 산문가인 이효석(1907~1942)의 대표작은 메밀 꽃 필 무렵’ ‘낙엽을 태우며등이 있다. 이효석은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로 아버지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동성동본인 아내와 결혼을 했지만, 아내와 딸이 병에 걸려 연달아 죽었다.

 

이효석은 절망과 고통으로 방황하다가 일본 도쿄로 갔다. 여기서 왕수복(王壽福)(본명: 왕성실)을 만났다. 이때 이효석은 34, 왕수복은 24세였다. 왕수복은 명륜여자공립보통학교 3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평양기생학교에 입학하였다.

 

기생학교에서 다양한 기예를 배운 왕수복은 노래에 재능을 보여 1933년에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울지 말아요한탄을 취입하여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최초의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가 되었다. 이효석은 독특한 작품으로 화제를 모으던 작가였고 왕수복은 시대를 앞서나간 신여성이었다.

 

이효석의 소설에 빠져있던 왕수복은 한 눈에 반해 평양에서 교직에 있던 이효석을 따라가서 혼인생활을 시작했다.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2년 만에 이효석은 수막염에 걸려 채 한 달도 못 버티고 죽었기 때문이다. 이효석과 왕수복의 사랑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단편소설 봄봄의 김유정과 박녹주

 

 

▲ 박녹주  

단편소설 봄봄의 김유정(1908~1937)이 사랑한 박녹주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호자로 지정된 국보급 유명 기생이었다. 휘문고 3년생이던 김유정은 공중목욕탕에서 나오는 박녹주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때부터 박녹주를 선생님이라는 예의를 갖춰 편지를 써 보냈다. 박녹주는 그 편지가 연서인 것을 알아차리고 편지를 반송했다. 다음날에는 반송한 편지가 다시 박녹주에게 왔다. 명기명창으로 송만갑, 유성준 등 당대 최고수 판소리 명창의 제자로서 컬럼비아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음반을 취입하는 유명인이었던 박녹주는 자신보다 연하인데다 학생인 김유정을 받아주지 않았다.

 

박녹주가 자신은 기생이고 연인이 있음을 밝히며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김유정은 공연이 끝난 박녹주를 스토킹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기생인 주제에 자신을 거절한다며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편지 끝에는 녹주 내 너를 사랑한다라고 혈서로 적어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박녹주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김유정은 자신의 문학 친구들에게는 박녹주와 연애를 했다고 말하거나 험담을 했다.

 

결국 김유정은 33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죽게 됐고 김유정의 친구들은 박녹주에게 니가 죽였지?’라고 저주를 쏟아냈다. 친구 김문집은 유정아, 총각귀신 유정아! 장가도 못 보내고 죽인 것이 무엇보다 분하다며 장례식장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시인 유치환의 플라토닉 사랑

 

 

 

▲  이영도 유치환 

시인 청마(靑馬) 유치환(1908~1976)과 시조시인 정운(丁芸)이영도(李永道, 1916~1976)의 플라토닉 사랑도 유명하다. 통영여중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유부남 유치환이 이영도를 만난 것은 38세였다.

 

그 때 이영도의 나이는 29세로, 남편과 사별을 하고 딸 하나를 데리고 가사 교사로 부임해 왔다. 그들은 같은 교사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어 동질감을 느끼며 사랑에 빠졌다.

 

이영도는 1940년대 말~50년대 말 통영에서 10여 년간 머물렀고, 그 후 부산으로 옮겨 67년 초까지 부산에서 생활했다. 유치환은 이영도에게 20년 동안 계속 편지를 보냈다.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하는 시행복은 한국인의 순애보적 애송시가 되기도 했다. 유치환은 이영도를 만나기 전에도 여자문제로 교직을 떠난 적이 있었다.

 

어느 글에선가 이 길 없는 애정의 방황은 나의 큰 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는 자성의 글을 썼다고 한다. 유치환의 피가 뜨거웠는지 아니면 끝없는 인생의 방황이었는지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유치환 자신뿐이었다.

 

유치환의 사랑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이 났다. 그것은 1967213일 저녁, 부산에서 난 교통사고였다. 이영도는 197636일 예순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유치환의 사랑은 이영도로 하여금 외로움과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받쳐 주는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또한 이영도의 유치환을 향한 그리움은 그녀의 시를 시들지 않게 해준 자양분이 되었다.

 

 

이상과 기생 금홍과의 사랑

 

 

▲ 이상과 기생 금홍    


이상
(본명 김해경 서울 출생, 19101937)은 경성고등공업학교를 나와 조선총독부 건축과에 근무한 건축기사로 현장에서 인부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이씨李氏라는 뜻)을 그대로 필명으로 하여 문단에 나왔다.

 

그는 23세이던 19334월 각혈로 총독부 기사를 사직한 후 황해도 연안군 백천온천으로 휴양을 떠난다. 그곳에서 21살의 기생 금홍을 만나 7월에 서울로 데리고 올라와 다방 제비를 개업하고, 금홍을 마담으로 앉히고 동거에 들어간다.

 

금홍이와 관계는 2년 반 정도 유지된 것으로 추정한다. 행복했던 것도 잠시, 금홍이는 이상에게 쓸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는 병신이라고 게다가 돈도 벌어올 줄 모른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면서 쌀쌀맞게 굴었다 한다.

 

남성편력이 화려했던 금홍이가 집을 나가버렸다. 이때 소설 날개가 탄생되었다. ‘날개는 소설이긴 하지만 자전적인 이야기다. '천재''광인'이라는 말을 듣던 이상은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로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하였다. 뿐만 아니라 암울한 시대에 날개를 펼 수 없는 절박함과 한계가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천재 시인 이상은 만 267개월을 살다 요절했다.

 

수필가 피천득과 아사코의 애틋한 사연

 

 

▲ 아사코

온 국민이 아는 수필 인연은 피천득(1910.5.292007.5.25)과 아사코(朝子)의 이야기로 애틋한 사연이 있다. 피천득의 호는 금아(琴兒, 거문고 소년). 금아는 춘원 이광수 선생이 지었다.

 

피천득의 나이 10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거문고를 잘 탔다는 얘기를 들은 이광수가 '영원히 어머니의 아이처럼 맑게 살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이광수의 작품 의 여주인공 유순은 금아가 요양원에 입원했을 때 돌보아 주던 간호사 이름이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피천득의 어머니를 모델로 쓴 단편소설이라고 한다.

 

수필 인연은 어린 시절 한 여자애와 얽힌 인연을 주제로 한 회상적, 감상적인 글이다. 피천득은 도쿄 미우라(三浦)선생의 집에서 세 모습의 소녀를 시기를 달리하여 만나게 된다. 그때 받은 감정이 주된 수필 인연의 줄거리다.

 

첫 번째,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아사코를 만난다. 저자는 그녀를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 생각한다. 두 번째 (14년 후), 대학교 3학년 때의 아사코를 만난다, ‘어느 덧 청순하고 세련된 귀한 집 딸이 되어 있는 아사코를 만난다.

 

세 번째(다시 10년 후), 일본주둔 미군정에서 일하는 일본계 미국인 2세와 결혼한 아사코와 마주쳤을 때, 백합 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을 발견한 피천득은 인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세 번째 만남은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만남이었다.’라고 아쉬워한다.

 

이 대목은 수많은 사람들의 몸을 저릿하게 한다. 세 번 모두 아사꼬를 꽃의 이미지로 묘사한 인연은 치밀한 짜임새가 있는 수필로 피천득이 '아사코'와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로 인연이란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해 주는 작품이다.

 

백석문학상을 태동시킨 진향과의 사랑

 

 

▲ 진향

천재 시인 백석(1912~1995)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으로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1935년 시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처럼 문단 최고의 미남으로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 재직 중 김영한과 극적으로 만났다. 교직원들이 요정으로 회식하러 갔을 때였다. 그에게 김영한이란 기생이 배정되었다.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1932년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기명(技名)은 진향(眞香)이었다. 권번에서 조선 정악계(正樂界)의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 문하에서 궁중무를 비롯하여 여창가곡 등을 배웠다. 문재(文才)를 타고난 김영한은 기생 생활 중에도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지만 함흥 제일의 명문가인 백석의 집에서 기생을 며느리로 들일은 만무했다. 백석과 김영한은 서울로 도피하여 3년 동안 동거하며 사랑을 불태웠다. 어느 날 백석은 김영한이 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백석은 자야와 사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썼다. 그 중 여성에 발표한 바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자야와 관련된 작품이라고 전해진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강제로 결혼을 시켰다.

 

백석은 부모가 정해 준 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왔다.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다.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자야는 요정 대원각을 차려 장사를 시작했다. 자야의 미모와 수완에 대원각은 서울에서 가장 번창했다. 199983살로 숨진 자야는 요즘 화폐가치로 1,000억 원대의 부지와 건물을 아무 조건 없이 길상사(吉祥寺)회주(會主)무소유의 저자 법정스님에게 시주한 사실은 유명한 얘기다.

 

뿐만 아니라 자야는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했다. 생전의 자야는 백석의 생일인 7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시를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 한다. 비운의 시인 백석이 남긴 시와 자야의 고결한 영혼은 스산한 문학판을 훈풍으로 감싸 안고 있다.

 

 

떠나가는 배의 박목월 시인의 사랑

 

 

▲ 박목월

박목월 시인(본명 박영종, 1916. 1. 6~1978. 3. 24)은 경주 출신이다. 시인의 떠나가는 배이별의 노래가 탄생한 사연은 깊다 19526.25 전쟁이 끝날 무렵 박목월 시인이 중년이었을 때 제자인 여대생 H양과 사랑에 빠져 가정과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자리도 마다하고 둘은 종적을 감추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박목월의 아내(유익순)는 그들이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남편을 찾아 갔다. 세 사람이 마주하게 되었다. 박목월의 아내는 '힘들고 어렵지 않냐?’며 돈 봉투와 추운 겨울을 잘 지내라고 두 사람의 겨울 옷 보따리를 내밀고 서울로 돌아왔다.

 

 

박목월과 H양은 그 모습에 감동한 나머지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했다. 박목월의 부인이 다녀간 며칠 후 부산에서 목사인 H양의 아버지가 찾아와 집으로 돌아가자고 딸인 H양을 설득했다. 사흘을 버티다 결국 이별을 선택한 H양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제주항으로 떠났다.

 

H양의 뒤를 박목월이 따라가고, 그 뒤를 당시 제주 제일중 국어교사인 양중해가 따라가며 이별 장면에 동행하였다. 이때 H양은 뱃전에서 고개만 떨어뜨렸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양중해가 그날 저녁에 시를 썼고, 같은 학교 음악교사인 변훈에게 시를 주어 불후의 명곡 떠나가는 배가 탄생 하였다.

 

이별의 노래는 박목월이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이별의 노래를 지어 사랑하는 H양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 시를 김성태 선생이 작곡하여 부산에서 발표했다.

 

 

사랑은 달콤하고 때로는 쓸쓸하고, 사랑은 막막하고 때로는 아프고, 사랑은 아련하고 때로는 외롭고, 사랑은 성()스럽고 때로는 성()스럽고, 어떤 문인의 사랑은 소설 같고, 수필 같고, 수기 같고, 일기 같아 답을 모르겠다.

 

정성수 프로필

 

서울신문으로 문단 데뷔

저서 : 시집/공든 탑. 동시집/꽃을 사랑하는 법. 장편동화/폐암 걸린 호랑이 외 다수

수상 : 세종문화상. 소월시문학대상. 아르코문학창작기금수혜 외 다수

) 전국책보내기본부장. 전주대학교사범대학겸임교수

) 전라북도교육문화회관 시수필전담강사. MRA이사. 향촌문학회장.

사단법인미래다문화발전협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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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9/25 [17:10]  최종편집: ⓒ womansen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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