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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2.13 [00:13]
그 어떤 친구보다 더 살가운 벗이 부부다
<초대 수필> 수필가 장재화 ‘오래된 벗’
 
장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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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가 장재화    

양산천()의 산책로 주변은 봄꽃들의 잔치마당이었다. 붉은 연산홍은 푸른 물과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가 되고, 하양 분홍 빨강색으로 단장한 베고니아는 다소곳이 고개를 들고 세상구경을 하고 있다.

 

느리광이처럼 뒤늦게 깨어나 잡초 틈에서 얼굴만 삐쭉 내민 민들레와 제비꽃은 여전히 수줍고, 수수꽃다리가 짙은 향기를 풍기며 유혹의 손을 흔든다.

 

냇물 따라 넓게 펼쳐진 유채꽃밭에는 카메라를 손에 든 아빠들이 어린 자녀를 모델삼아 추억 만들기에 여념이 없고, 알뜰한 아낙네들은 쑥이며 씀바귀 등, 늦은 봄을 캐고 있다.

 

둑을 따라 조성한 산책로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엄마.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는 노인들. 그 앞을 젊은이들이 보란 듯이 가볍게 달리고 있다.

 

그리고 물 위에는 미처 떠나지 못한 가창오리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느라고 분주하다.

 

양산천의 가창오리와 쇠백로는 세월의 흐름을 반추하는 시계추다. 겨우내, 냇물을 화선지삼아 갈퀴발로 산수화를 그리던 오리가 떠난 뒤 쇠백로가 그 우아한 모습을 나타내면 사람들은 봄이 깊었음을 안다.

 

고독한 철학자처럼 여름 내내 저 홀로 사색하던 쇠백로가 찬바람을 피해 옛집으로 돌아간 다음, 차가운 북풍을 타고 오리 떼가 다시 돌아오면 또 한 해를 마감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도 피부로 느낀다. 그리고 아하! 또 한 해가 부질없이 가버리는구나하고 회한에 잠긴다. 

 

그 느낌표의 명암은 젊은이보다는 노인에게 더 진하게 각인된다. 앞으로 몇 번이나 저 오리들의 군무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서글픔 때문이다. 그리고 가버린 어제와 찾아올 내일을 생각하며 우정과 사랑, 그리고 인생에 대해 관조하는 시간을 갖는다. 아내와 나도 때때로 이 길을 걸으면서 사색에 잠긴다.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고 한다. 술통, 그 짙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주정(酒精)은 세월과 함께 익어가고, 오랜 친구는 같이한 시간만큼 다정해진다.

 

  비록 서로의 꿈이 다르고 인생에 도전하는 방법도 제각기 달랐지만, 좌절과 환희의 기로에 설 때마다 같이 아파하고 같이 기뻐한다. 다투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생의 동지가 된다. 그것이 오래된 벗이다.

 

  부부도 늙으면 오래된 벗을 닮아간다. 아니 그 어떤 친구보다 더 살가운 벗이 부부다. 좋은 부부란, 잘 익은 술처럼 농밀하고 한 마디 말의 억양과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부부를 말한다.

 

  때로는 질화로 속의 숯불처럼 뜨겁고, 가끔은 불씨 꺼진 재처럼 싸늘해지지만 작은 바람기만 있어도 사랑의 불꽃은 다시 피어오른다. 그래선지 쉽게 짜증내고 화도 잘 낸다. 어린아이처럼 응석도 부리고 싶어 한다. 어떻게 해도 당신의 넉넉한 마음으로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하고 포용해줄 거란 믿음 때문이다.

 

재미없는 부부는 무덤덤한 부부다. 감동을 잃어버린 부부다. 그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아무런 대안도 찾지 못한 채, 마지못해 같은 이불 덮고 한솥밥 먹으면서 남남처럼 산다. 서로에게 기대지도 않는다. 

 

  여기서 채근담의 명언 하나를 빌리자.

  물고기는 물이 있기 때문에 헤엄치고 살지만 물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새는 바람을 얻어서 하늘을 날지만 바람의 고마움을 모른다.

 

무덤덤한 부부가 바로 그렇다. 물고기 같은 남편은 물인 아내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새와 같은 아내는 바람 같은 남편의 고마움을 모른다.

 

불가(佛家)에서는, 전생에서 7.000겁의 인연을 쌓아야만 현세에서 부부로 만난다고 한다. 1겁은 천지가 한 번 개벽된 후 다시 개벽이 될 때까지의 시간이라고 하니 그게 어디 예사 인연인가. 그러나 무덤덤한 부부들에게 있어 7.000겁의 인연쯤은 가치를 상실한 물이며 바람처럼 의미를 잃는다.

 

조선시대의 새색시는 장 36가지, 김치 36종류, 36가지 정도는 빚을 수 있어야 양가집 규수로 대접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108종류는 커녕 18가지 음식도 만들 줄 몰랐던 아내와 내가 부부라는 이름으로 하나 된 지 어느새 38년이 지났다.

 

그 동안 우리의 결혼생활이 무풍지대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순항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뒤에는 내가, 내 뒤에는 아내가 있다.’는 평범한 방정식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았던 까닭이다. 쓸개처럼 쓴 인생의 뒤안길도 함께 걸었고 꿀처럼 달콤한 시간도 같이 가졌기 때문이다. 

 

사랑의 등급은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에서 결정된다. 별 것 아닌 일로도 쉽게 등을 돌리는 것은, 자신에 대한 상대의 사랑이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서운함과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만큼, 또는 너에게 주는 만큼 나도 받아야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 손을 잡는 것은 마음을 잡는 것이다.   

 

잠자는 사람을 깨우는 방법 중의 하나가 잠든 사람의 얼굴을 자신의 그림자로 덮어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솜처럼 부드럽고 포근하다. 그래서 잠자던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난다.

 

그러나 미워하는 마음이 만든 그림자는 차디차다. 그 그림자에 덮인 사람은 가위에 눌린 듯이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다. 사랑의 등급은 그렇게 마음가짐 하나로 결정된다.

 

비록 남아 있는 날이 살아온 날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겠지만, 나는 아내의 오래된 벗이 되고 싶다. 이왕이면 사랑의 그림자가 되어 아내를 덮어주고 싶다. 물의 고마움을 아는 고기, 바람의 존재를 아는 새가 되고 싶다.

 

그러나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따라서 마음이 나를 그렇게 이끈다고 해서 섣불리 발설해서는 안 되겠다. 아직은 마음뿐일 뿐,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있으니까.

 

앞서가는 노부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다. 그 정겨운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음인지 아내도 슬며시 내 손을 잡는다. 손을 잡는 것은 마음을 잡는 것이다. 수도 없이 많이 잡아본 아내의 손이지만 한결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봄기운에 취한 탓인가 보다.

 

 

프로필

- 한국예총 예술세계 2004년 등단

- 수필집 산정화

신화의 산 역사의 산

- 시나리오 사격장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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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0/12 [00:26]  최종편집: ⓒ womansen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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