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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0.21 [07:54]
“가난과 역경과 질곡… 편히 쉬소서”
<초대 수필> 김원철 ‘어머니 내 어머니 고재순’
 
김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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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라는 가슴 찡한 단어는 없어

이부형제(異父兄弟)두신 어머니 인생

  

재혼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 쓰라림

모든 것 가슴속한 많은 생을 마감

 

어머니!’ 불러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 세상에서 어머니라는 단어보다 가슴 찡한 단어는 없다. ‘어머니!’ 불러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어머니는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붉게 물든 서쪽 하늘로 날아간다. 천만년 길고 길 것 같은 한 생이 억겁의 시간 속에서는 찰나에 불과하다. 세상에서 어머니라는 단어보다 가슴 찡한 단어는 없다. ‘어머니!’ 불러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이부형제(異父兄弟)인 큰 동생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동생의 눈도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 동안 어머니를 모시느라고 수고했다고 말하자. 동생은 겸연쩍다는 듯이 웃는다. 친동생은 아니었지만 내 동생이라고 생각하자 어머니와 눈매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노트 한 권을 내민다. 무슨 노트냐고 묻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형님에게 꼭 전해주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노트는 낡아 있었다. 나는 고맙다! 잊지 않고 전해줘서동생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더니 어머니께서 형님 생각을 많이 하셨어요순간 목이 멨다.

 

네게는 관심조차 없었던 줄 알았는데 나를 잊지 않았다니 어머니 살아 생전에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내와 함께 집에 돌아 와 노트를 펼쳐봤다. 표지는 헤지고 안쪽 종이도 누렇게 변해 있었다. 글씨는 삐뚤삐뚤했다. 그것도 가로 글씨기 아니라 세로글씨였다. 오탈자도 많고 띄어쓰기도 엉망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쓴 글이라고 생각하니 이 세상 어느 글자보다 정감이 갔다.

 

몇 장을 넘기자 어머니가 재혼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쓰여 있었다. 자식을 떼어놓고 떠나 올 때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절절하다. 원망스럽고 미웠던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봄눈이 녹듯이 녹아내렸다.

 

철이 들고 외로움이 망촛대처럼 웃자라던 시절이었다. 어느 여름밤 할머니와 마당에 펼쳐놓은 멍석 위에 누워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옆에 펴 놓은 모깃불 속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밤하늘의 별들은 초롱초롱했다. 부채질을 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제 너도 니 어미를 찾아야 한다.

 

이제 너도 니 어미를 찾아야 한다. 니 어미는 아무 죄가 없다. 니 애비 술 때문이었다. 니 외할머니가 니 어미를 데리고 갔다. 그게 니 세 살 때 일이다.’

 

할머니 말을 듣는 순간 별똥별 하나가 하늘 복판을 긋고 사라졌다. 나는 할머니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할머니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짜증을 냈다. 내 말을 듣던 할머니는 연신 부채질만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은 아버지가 일본에 들어가셨다가 나오신 해방 직전이었다. 원불교 익산지부에 다니시는 어느 할머니의 중매로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전남 화순군 능주면 원지리에서 시집을 오셨다. 당시 아버지 35세 어머니 24세로 늦은 결혼이었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가정을 꾸려가려면 부부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을 돌보는 일보다 술을 좋아하셨다. 매일 술에 젖어 있다 보니 살림은 엉망이었다.

 

어머니 혼자서 할머니를 비롯한 식구들의 호구를 책임 짓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는 친정에 손을 벌리게 되었다. 손을 벌릴 때마다 외할머니가 누구보다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사위인 아버지는 외할머니에게 사위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엄감생신이었다.

 

드디어 어머니는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어린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할머니나 아버지는 내게 어머니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묻지 않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세월은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

 

나는 철이 들어가자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에서 돌처럼 굳어져 갔다. 신문배달과 구두닦이로 학비를 벌어 중학과정인 야간고등공민학교를 다녔다. 검정고시에 합격해 야간고등학교를 입학하여 고등학교 과정 3년을 마쳤다.

 

대학에 가고 싶었다. 대학에 다니려면 등록금과 학비가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고 또 해봐도 답은 없었다. 문득 교대를 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교대를 졸업하면 발령이 잘 났다. 발령이 난다는 것은 봉급을 받고 봉급을 받으면 생활이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잘 가르쳐 보겠다는 생각보다 생계를 위해서 모 교육대학에 응시했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제사보다 젯밥에 눈이 어두웠으니 사필귀정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부풀어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부풀어 갔다. 이제 어머니를 찾아보자. 어머니는 어떤 분이실가? 기억조차 떠오르지 않는 어머니 얼굴을 마음대로 그려보았다. 그럴수록 어머니의 얼굴은 등 뒤로 숨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어머니의 행방과 소식을 수소문했다. 다행이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맺어주신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를 찾고 싶었던 한 줄기 희망이 현실이 되었다.

 

익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송정리역에서 내렸다. 송정리역에서 순천행으로 갈아타 화순과 능주역 중간에 있는 간이역 만수역에서 내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맺어주신 할머니의 말대로 그 할머니 딸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할머니 딸의 안내로 이웃마을에 갔다.

 

이웃마을에 도착하자 어느 집으로 할머니 딸이 들어갔다. 나는 사립문 밖에 선채 안을 기웃거렸다. 가슴이 뛰고 숨이 막혀왔다. 한참을 기다렸다. 사실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짧은 그 시간이 나에게는 천년이었다. 할머니의 딸과 함께 나온 촌로가 내 손을 덥석 잡더니

 

내가 잘못했다. 너를 놔두고 내가 못된 짖을 했구나!’ 울먹인다.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는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방안에 어머니는 없었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어머니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외할머니는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어머니는 여기 살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외사촌 형과 어머니가 산다는 전남 장성군 남면 평산리로 향했다. 어머니집에 도착하자 입안이 바짝 말랐다. 어머니 집은 오두막집이었다. 눈이라도 흘기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마당은 손바닥만 했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나를 외사촌 형이 소개하자. 어머니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설움이 복 받쳤다. 어머니가 신고 있는 검정고무신은 닳고 닳았다. 옆구리는 터졌고 꿰맨 실밥 한 가닥이 마지막 힘을 보태고 있었다.

 

어머니가 입고 있는 치마는 싸구려 뽀뿌링 치마였다. 어머니 옆에서는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여자와 남자아이들이 너는 누구냐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동안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한 순간에 천길 만길 나락으로 떨어졌다. 옆에 서 있던 외사촌 형이 내 마음을 알기나 한다는 듯이 내 소매를 잡더니 이제 어머니를 봤으니 돌아가자고 한다.

 

송정리역에서 익산으로 돌아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승객 틈에 자리를 잡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이었다. 가난에 찌들어 처절하게 사는 어머니 모습이 가슴을 후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삶만이 힘든 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의 현실은 내 백배의 고통이었다. 어머니를 보고 싶다는 것은 어머니의 경제적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것이었다. 당시 고학을 하는 내 입장으로는 한 푼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바야 아니 간 것만 못하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차장 뒤로 질주하는 풍경들을 보면서 내 힘든 삶도 쏜살 같이 지나기를 바랐다.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숙부에게 맡기고 군용열차에 몸을 싣고 연무대로 향했다. 익산역에서 숙부님을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던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시려 온 세상이 얼음장 같이 차게만 느껴진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까지 한 번도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어머니와 자식인 나에게 미안함이었는지 아버지의 자존심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했다. 무정한 세월은 흘러가며 세파를 헤져 나가도록 혹독하게 나를 단련시켰다.

 

그런 삶이 나의 삶이였고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버리고 온 자식을 생각하며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의 삶 또한 오죽했으랴. 생각할수록 미운 것은 현실이었다.

 

나에게는 한 가지 바람이 있었다. 그것은 험한 세상의 길을 걸어오면서 두터워지고 부릅튼 발을 씻겨드리고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고 어머니의 밭톱을 깎아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행복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볼 것이고 나는 행복해 하는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작은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은 체 어머니는 제 세상으로 가고 나는 늙어 갔다.

 

어머니와 나는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감정도 눈물도 메말랐다. 세상 풍파 속에 부딪치고 넘어지며 기울어져 가는 노을처럼 약속된 삶의 시간을 향해 가고 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끝이 없을 텐데 모든 것을 가슴속에 묻어 둔 채 20141014(음력 914) 어머니는 그렇게 한 많은 생을 마쳤다.

 

향년 92세였다. 가난과 역경과 질곡 속을 살아가면서 버리고 간 자식에게 고재순이라는 이름 석 자만 내 가슴에 남겨 놓고 밤 하늘별이 되었다. 사진 한 장 없는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이 자식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프로필

- 전북 익산 출생

- 전주교도소 명예 퇴임

- 국무총리·법무부 장관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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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0/12 [18:51]  최종편집: ⓒ womansen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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