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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3.22 [17:01]
‘상’ 대내외 무역, ‘주’ 농경문화 ‘발달’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0) ‘상나라와 주나라’
 
김정룡 중국동포타운신문 대표

 

▲ 고대 4대문명 중 하나인 중국문명은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이미 완성되었다. 선진시대란 진()BC221년 천하를 통일하기 전 하()()() 삼대를 말한다   


 

중국문명은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완성. 선진시대는

() 천하통일 이전, ()()() 삼대지칭

 

상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나라 국호에서 유래된 말

 

주나라는 사람의 일을 관장하는 사관(史官)을 중시해

 

 

김정룡 중국동포타운신문 대표    


 

()()() 삼대 문화특징

 

고대 4대문명 중 하나인 중국문명은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이미 완성되었다. 선진시대란 진()BC221년 천하를 통일하기 전 하()()() 삼대를 말한다.

 

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최초로 되는 왕조국가로서 대략 BC 2000경 세워졌다. ‘나라는 황하 중하류 지역, 일명 중원에 자리한 국가였고 구성원의 주체민족은 하족(夏族)이었다.

 

하나라의 초대 왕은 우()임금의 아들 계이다. 부전자전이란 말이 있듯이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 치수에 능했다. 하나라의 특징을 한 마디로 규명하자면 치수이다. 이 외 후대에 전해진 구체적인 문화코드가 없다. 그래서 하나라가 실존했느니, 전설적인 나라였느니 하는 시시비비가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나라가 실존했다면 대략 400년 동안 유지되다가 걸()이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한다. 오늘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일 개 미인 계집을 위해 주지육림을 만든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거짓이다.(필자의 주지육림의 진실편 참조)

 

아무튼 하나라는 걸왕을 마감으로 나라가 상족(商族)에게 넘어갔고 상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두 번째 왕조국가였다.

 

▲ 동쪽에서 중원에 들어온 상족은 매우 역동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주나라는 문왕의 할아버지 공단보(公亶父) 때 주원(周原, 지금의 섬서성 歧山)에 이주했고 이때부터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태양의 신조(神鳥)를 따라 동쪽에서 중원에 들어온 상족은 매우 역동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우선 상나라문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청동기와 갑골문이다. 이외 상나라는 수공업이 발달하여 상업이 흥성했다. 중국인이 매매업을 상업, 장사하는 사람을 상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나라 국호에서 유래된 말이다.

 

민족(周民族)은 상나라 시기 별로 볼꼴 없는 약소 민족이었다. 주 문왕의 할아버지 공단보(公亶父) 때 주원(周原, 지금의 섬서성 歧山)에 이주했고 이때부터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주원은 경수(涇水)와 위수(渭水)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경수와 위수를 합쳐 경위라고 부르는데 사물의 이치에 대한 옳고 그름의 구분이나 분별에 쓰인다. 구체적으로는 중국의 경수는 흐리고 위수는 맑아 뚜렷이 구분된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주원은 어찌 보면 메소포타미아와 비슷하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메소포타미아는 그나마 기름진 땅이었다. 두 강을 끼고 있는 주원도 땅이 기름지고 물과 풀이 풍부했다.

 

시경에 이르기를 주원은 산나물조차 단맛이고 올빼미가 울면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하다.” 이런 곳에서 흥기한 주 민족은 아마 농업에 가장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민족 시조 기()는 요순시대에 부족연맹의 농업부 장관을 맡아 후직(后稷)이라 불렀다고 전하고 있었다. ‘는 리더를 뜻하고 은 좁쌀을 뜻하므로 후직은 농업을 관장한다는 의미이다.

 

주 삼대의 문화코드를 개괄하여 말하자면 하나라는 치수에 능했고, 상나라는 청동기와 갑골문을 발명하였고, 주나라는 농업에 가장 자신이 있었다.

 

▲ 상나라는 갑골문자를 발명하였다.   


이중텐 교수는 저서중화사에서 중국문화 흐름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삼황오제부터 하나라까지는 모색단계였고 상나라는 중화민족의 거칠고 미숙한 유년기였다. 주나라 이후에야 성숙하고 안정되었다. 국가제도는 신해혁명 이전까지 단 한 번 바뀌었는데 그 시기는 전국시대부터 진한 시대였다. 그리고 사회제도와 문화제도는 서주부터 명청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바로 소농경제를 기초로 한 종법제도삼강오륜의 윤리를 핵심으로 하는 예악제도였다. 바로 이것이 중화민족의 정신적 기질을 결정했다.”

 

상나라와 주나라 문화비교

 

상나라는 수공업이 발달하여 발해 연안에서 세계 각지를 대상으로 무역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청동기와 갑골문을 사용하여 당시에는 가장 선진적인 국가로 각광받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중텐 교수는 상나라의 문화적인 특징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과학, 기술, 예술, 예언, 정치화된 샤머니즘에 심취해 자신들의 문명을 낭만적이고 신기하며 기괴하면서도 아름답게 펼쳐나갔다.”

 

이렇듯 창성하던 상나라가 망했다. 그 이유는 과도한 제사행사에 국가 재정을 거덜 냈고, 인간 제물에 순장제도까지 겹쳐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 민심이 떠났기 때문이었다.

 

▲ 창성하던 상나라가 망했다. 그 이유는 과도한 제사행사에 국가 재정을 거덜 냈고, 인간 제물에 순장제도까지 겹쳐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 민심이 떠났기 때문이었다.     

 

상나라를 뒤엎고 그 땅에 승리의 깃발을 꽂은 민족은 민족이었다. 주나라는 장기집권을 위해 상나라와 완전 다른 길을 모색하고 걸었다. 그래서 서주와 동주를 합쳐 800여 년 동안이나 버텼다.

 

상나라와 주나라의 문화적인 코드는 어떤 차별이 있었을까? 첫째 상나라는 수공업 중심에 대외무역과 대내 장사가 발달하였고 주나라는 정착된 농경문화를 추진하였다. 청나라 말기까지 나라를 다스리는 골격문화였던 유가와 법가는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생겨났고 발달되어 왔던 것임을 미리 알려둔다.

 

둘째 신과 조상을 대하는 방식에서 상나라인은 신에게 술, 주나라인은 신에게 밥을 대접했다. 상나라의 예기는 대부분 주기(酒器), 주나라의 예기는 주로 식기였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셋째 상나라는 무관(巫官)을 중시했고 주나라는 사관(史官)을 중시했다. 무관은 귀신을 섬기는 제사를 받드는 제사장 관직이었고, 사관은 사람의 일을 관장하는 관료였다.

 

노자가 당시 초나라 중앙도서관 관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를 주지사(周柱史)’, 즉 당시 유명한 사관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주나라 때부터 쇠락하기 시작한 무관의 흐름이 한나라 및 그 이후 역사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고 민간에서도 무속문화가 전혀 맥을 추지 못했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조선시대까지도 무녀가 국가행사에 참여하고 지금까지도 무속신앙이 활발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 민족(周民族)은 상나라 시기 별로 볼꼴 없는 약소 민족이었다.  


넷째 상나라는 활달하고 낭만적이었던데 비해 주나라는 이성적이고 근엄했다. 이 비교는 현대까지도 지속되어온 유효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즉 중국한족은 매우 이성적이고 근엄한데 비해 주변 소수민족은 매우 감성적이고 낭만적이고 활달하다.

 

동이족 한 갈래이며 상나라 후예라고도 불리는 한민족의 특징도 성격상 매우 감성적이고 낭만적이며 활달하다.

 

일각에서는 중국인의 이성적이고 근엄한 성격은 그들의 문자 생활과정에서 생겨나고 지속되어왔다고 주장한다. 즉 중국인은 기타주변 민족에 비해 일찍이 문자를 만들어내고 높은 차원의 문화생활을 영위해왔다.

 

전형적인 실례로서 중국인은 시에 빠져 있었는데 차를 마시면서 고상하게 시를 읊고 그 격조를 음미하는 것을 최고의 지적인 문화향수라고 인식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 가무를 발달시키지 못했다.

 

시에 빠져 있는 문화향수는 사람을 이성적이고 근엄하게 만들었던 반면에 가무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낭만적이지 못하고 활달하지 못하다. 필자가 중국에서 40여 년 살아본 경험을 미루어 볼 때 이런 주장에 참으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 주나라는 사관(史官)을 중시했다사관은 사람의 일을 관장하는 관료였다.

주나라인은 어떻게 이성적이고 근엄했던가?

 

BC 1046년 주나라 군대는 정월에 출병하여 2월에 승리했다. 재래식 전쟁 치고는 쉬워도 너무 쉽게 상나라를 무너뜨렸다.

 

너무 쉽게 얻은 성과는 너무 쉽게 무너진다는 속설이 있다. 패배한 나라인은 일부가 요동반도와 한반도로 물러난 것 말고는 대부분의 잔여세력이 여전히 중원에 흩어진 채 재기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천하의 인재 주공이 이 도리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늘 걱정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이고 지금 주나라 왕의 숙부이니 지위가 낮은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도 나는 머리를 감을 때도 식사를 할 때도 걸핏하면 중간에 멈추고 속 시원히 하지 못한다. 왜 그런 줄 아느냐? 한시도 긴장을 풀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패배시키고 천하의 주인이 된 명분을 천명이라 했다. 그런데시경商頌에서 상나라 시조 설()의 탄생에 관해 노래한현조를 보면 하늘이 검은 새에게 명하여 지상에 내려가 상을 낳게 했다.”라고 읊고 있다.

 

이것은 하늘이 검은 새를 천사로 파견해 상나라인에게 역사적 사명을 부여했다는 뜻이다. 하늘의 뜻으로 세워진 상나라, 주나라 자신들이 천하의 주인 된 것도 천명이라면 또 다른 민족이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느냐? 주공의 걱정은 이런 것이었다.

 

▲ 주나라는 정착된 농경문화를 추진하였다.   


하물며 주나라의 실력이 아직 천하의 주인이 되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점을 주공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주공은 승리의 열매를 지키고 오래도록 길이 빛나게 하기 위해 이성과 냉정함을 발휘하였다. 무왕의 주왕 토벌에서도 주공의 반란 진압에서도 승리한 주나라인은 상나라 귀족들을 포로로 취급하지 않았다.

 

족쇄와 수갑을 채워 감옥에 두지도 않았고 나라 잃은 노예로 부리지도 않았다. 무경(武庚, 무왕의 아들)을 살해한 후, ‘나라인은 또 상나라의 옛 도읍 상구(商丘)에 주왕의 배다른 형인 미자계(微子啓)를 봉하고서 국호를 송이라 붙여주고 작위 중 가장 높은 공작(公爵)의 대우를 해줬다.

 

그럼에도 주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원치 않는 이들은 자유롭게 떠나 먼 타향으로 떠나게 했다. 그 중 일부는 베링해협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서 인디언의 조상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필자는 문재인 정부를 주나라 초기에 비교하면서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에 주공처럼 걱정하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김정룡 프로필

-)중국동포타운신문 대표

-장춘대학교 일본어학부 전공

-연변제1교 일본어 교사 역임

-著書)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멋 맛 판> 2015

-著書)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

<천국의 그늘> 2015

 

 

 


원본 기사 보기:모닝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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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1/04 [05:07]  최종편집: ⓒ womansen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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