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광고
광고
정치·사회경제·IT여성·교육농수·환경월드·과학문화·관광북한·종교의료·식품연예·스포츠피플·칼럼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 찾기
전체기사보기 全北   全國   WAM特約   영문   GALLERY   양극화   인터뷰   의회   미디어   캠퍼스 재테크   신상품   동영상   수필  
편집  2019.04.20 [03:02]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픔이어 아름답다”
<주부일기> 나의 자서전, 이춘명을 담다
 
이춘명 칼럼니스트

 

▲  필자(왼쪽)  딸과 함께 

 

 

인형극을 위한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상상 생생 인형 단원이다. 내 인생의 두 번째 시작점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역할이 있는 어르신이다. 순수 창작에 남은 정열을 쏟으며 살 각오가 늘 출입문을 수시로 열고 있다.

 

대본을 쓰고 수정하고 리딩하며 가사에 곡을 붙여 표현하는 색다른 모습으로 매일 가꾸고 있다. 봄 춘 목숨 명에서 봄 춘 밝은 명으로 개명을 하고 삶의 태도는 바뀌었다. 운명에 맡기자, 왜 명이 쓸데없이 길까, 오래 살아서 뭐해 체념하는 남은 시간들이 붉게 물들며 열리는 아침을 보려고 서서히 열려지는 창문이 되고 있다.

 

안 해 본 것을 해 보자 다니지 않은 길을 가보자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자를 모티브로 잡고 여백의 시간은 나의 행보이다. 인형극을 위한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성인극, 아동극 십여 편을발표하고 있다.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준비가 소요된다. 먼저 발상과 소재와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지면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동극을 위한 동시는 매일 자라는 5살 아이의 모습과 말을 관찰하며 순간순간 기록하고 있다.아이들의 눈으로 생각으로 어른들에게 부모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임무라고 생각하며 나의 시간을 투자한다.

 

성인극은 고독과 가족을 주제로 주변 노인들의 애환과 일상을 옮기고 있다. 창작은 억지로 꾸미는 스토리가 아닌 바로 곁에서 보여지는 이야기를 구성하여 대본으로각색하여 인형이 대신 표현하는 음악 미술이 함께 하는 종합 예술이다.

 

나는 극단에서 주인공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름의 특성과 재질과 성실로 함께하는 시간은 늙을 시간이 없다. 극단 단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인생 계획표에도 없었다. 나도 놀라는 반전이다. 그동안 나를 알던 사람들은 별 걸 다해라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기초적인 전공이나 실력이나 바탕이전혀 없다. 그 방향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나이가 먹을수록 겁은 적어지고 배짱은 두꺼워지고 호기심은 가벼워진다. 단 한마디 대사를 하는 배역이라도 나는 상상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인형극단 단원이다.

 

▲ 단 한마디 대사를 하는 배역이라도 나는 상상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인형극단 단원이다.    

 

 

손자의 성장일기 13권째 책장을 채우고

 

삶의 여유로 시간을 나누며 지내고 있다. 보너스로 받는 대낮 휴식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고 그림책을 만들었다. 나에게 선물로 온 손자의 일상을 5살 아이가 읽을 수 있게 비록 어설프게 색을 칠하였지만 첫 동화라고 자부한다. 태교 때부터 열 달 기다리는 시간과 6월 예정일 열흘 앞당겨 나와 준 생명이 뒤집고 기고 앉고 서고 뛰고 말하는 1300일을 16장으로 그려 놓았다.

 

표정과 몸짓을 옮겨 아직 글을 모르는 아이가 그림으로 읽는 어느 날 엄마에게로 왔어요 젖병을물고 이유식을 먹고 아기띠를 하던 날까지 기억하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생일날을 맞을 때마다 친구들과 놀 때마다 엄마 품에 안겨 세상 구경을 하러 나가는 날 읽을 때마다 다 다른 억양으로 다른 느낌으로 만드는 변화는 성장하는 속도와 비례하고 있다. 손을 잡고 골목을 걷고자전거 타고 공원에서 마음껏 속도를 내고 빙빙 도는 발달 과정을 바라보는 마음은 빨리 늙어가는 것보다 잘 자라주어 기특하다는 기쁨으로 인생의 상여금을 받고 있다.

 

하루 10분 성장 일기는 13권째 책장을 채우고 있다. 삶의 여유는 경제적 여유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의 하루하루를 기록해 주는 것이다. 나의 자서전을 썼고 아이의 자서전을써 주는 것이다.

 

글을 읽을 줄 알 때 군대를 가거나 결혼을 하거나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슬퍼할 때 꺼내 읽으면 자신의 유년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주는 일로 매년 1권의 그림책을 만드는 것이 노후의 소박한 궁리이다. 삶의 고비나 어려운 결정에 의논할 가족이 없을 때 자기의 성장 과정을 다시 되짚어 보면 조금은 위안이 되고 만족하게 못해 준 어머니에 대한섭섭함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집안의 가장 어른으로서 할 일은 눈을 뜨고 손목을 쓸 수 있을 때 내 곁에 있는 아이의 매일 매일을 꼼꼼히 정확히 기록하는 일이 재미있게 늙어가는 맛이 되고 있다. 쉬는 시간 나의 쉼표는이 소중하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나날을 백지 안에 옮기는 일이다.

 

▲ 하루 10분 성장 일기는 13권째 책장을 채우고 있다. 삶의 여유는 경제적 여유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의 하루하루를 기록해 주는 것이다. 나의 자서전을 썼고 아이의 자서전을써 주는 것이다    

 

 

춘명은 자서전 전도사입니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3년 전 출간한 자서전-이춘명을 담다-에 빠짐없이 기억해 놓았다. 나는 명함이 없다. 나를 소개할 때 자서전 전도사입니다라고 말한다. 40세부터 쓰기를권장한다.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이 첫 번째 시작이다. 부모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효도의 시작이다. 자서전을 쓰고 나서 나의 됨됨이는 달라졌다.

 

나의 첫 기억부터 꺼냈다. 층격적인 아직도 가슴에 대못이 박힌 말 한마디나 사건을 적고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찾아봤다. 주민등록등본과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하여 살아온 흔적과 관계를 줄 이어긋기를 하였다.

 

생활기록부와 학적부를 무료로 뽑아 객관적인 나를 다시 바라볼 때 며칠몸살이 나고 이유 모를 눈물이 자꾸 나와 퉁퉁 부운 얼굴로 외출도 못할 지경이었다.

 

▲ 내가 나를 바라보며 평생 울었던 분량보다 많이 가슴 속 짠기를 다 빼내었더니 숯덩이가 쑥쑥 빠져 나가는 듯 했다.    

 

모르게 누르고 감추었던 유년의 아픔을 다 토해내니 헛구역질과 역류성 위염 증상까지 생겼다. 내가 나를 바라보며 평생 울었던 분량보다 많이 가슴 속 짠기를 다 빼내었더니 숯덩이가 쑥쑥 빠져 나가는 듯 했다.

 

차근차근 10대부터 20대로 넘어가면서 평정을 찾아 다시 청춘과 젊음과 성년과 성인과 내가 선택한 가정과 가족의 중심에 앉게 되니 40여일 만에 한권의 자서전을 잉크 묻히게 되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다보니 미처 못한 말과 다 고마움을 전하지 못한 인연들은 다시 제작 할 자서전 2집 사람 위주 회고록으로 한 페이지씩 채워지고 있다.

 

자서전 쓰기는 유행도 아니다. 자랑질도 아니다. 독백이고 고해성사라고 나는 믿는다. 한번 훌러덩 다 벗고 나니 나는 자신감이 생기고 나를 비하하고 덮으려고 애쓰던 모든 궁핍함에 고개를 꺾지 않게 되었다.

 

삼분의 이를 살아 온 날을 중간 평가하고 남아있는 짧은 날 아니면 골골하게 살 긴 날에 덜 후회하고 덜 비난 받지 않기 위해 예비역 근무 중이다.

 

누구나 먹고 사는 것은 같다. 자식을 낳고 기르고 뒷바라지 하고 남남이 만나 지지고 볶고 각자의 신앙에 충성하고 부귀영화를 부러워하거나 누리는 다 거기서 거기인 삶에서 자서전은 잘 나고 못나고 글 솜씨가 있고 없고를 떠나 자신을 이 세상에 흔적없이 먼지로 훅 불어 날리는것이 아닌 일이다.

 

나의 삶의 개박 계획으로 첫 번째 성공 사례 실패 원인 주고받은 은혜 갚은빚 잊어야 할 베품 자식이 찾아가 주었으면 하는 고마움에 대한 요약본이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어제까지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이었고 오늘 만날 사람들이다.

 

 

▲ 44살부터 59세까지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부터 시작했다. 단체 급식 조리원으로 정년 퇴직할 때까지의 나의 노동은 나를 설명해 주는 조각들이다  

 

 

삶의 분신급식조리원의 정년 퇴직

 

44살부터 59세까지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부터 시작했다. 단체 급식 조리원으로 정년 퇴직할 때까지의 나의 노동은 나를 설명해 주는 조각들이다. 집에서 살림만 하다가 정보지 광고를 보고남의 집 일을 한 시간은 자식의 학원비 등록금 논문비를 위한 걸음이었다.

 

자식을 위해서 생계일선으로 나간 직업은 손에 구정물을 묻히고 장화를 신고 비닐 앞치마를 입고 그릇 닦는 일부터했다. 12시간 주말 근무 월 2회 휴무로 시작하여 4대 보험이 되고 주5일 근무하고 점심 제공 30분 휴식이 보장되는 곳으로 옮겨가는 시간은 15-6년이 걸렸다.

 

날씨 탓 매상 탓 등등의 갑질의 피해로 제때 나오는 월급날을 행복으로 살면서 종착점은 8개월실업 급여였다. 열실히 일한 보상이었다. 그 보상으로 꼬박 1년을 배우고 싶은 과목의 수강료로다 썼다. 나를 위해 다 썼다. 억울하다는 잃어버린 젊은 날을 바꾸는 기분이었다.

 

주방 아줌마는 익숙한 호명이었다. 종일 뜨거운 김을 얼굴에 쏘이면서 여름에 땀띠 나고 겨울에동상이 생기는 힘들고 더럽고 구차한 일은 나의 마지막 선물로 고용 보험의 짭짤한 셈을 주었다.밑바닥부터 일을 한 힘든 시간이 나를 살려 주었다.

 

 

그때 최고 직업순위 1위가 은행원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때 최고 직업 순위 1위가 은행원이었다.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주산 부기 타자 2급 자격증으로 은행원의 시절은 가장 짧고 가장 뿌듯한 경험이었다. 동대문 야구장 뒤쪽에 있는 고등학교 상과 출신이다. 은행 촉탁으로 수습 3개월 기간 중에 졸업하고 기혼자로 퇴직해야 했던 시대였다.

 

그때 최고 직업 순위 1위가 은행원이었다. 초급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과 아버지와 떨어져 살고 싶은 독립의 욕구로 국민학교 6년 개근상에 이어 중등 우등 배지를 왼쪽 가슴에 달고 다녔다. 성적 순위와 자격증 취득이 생명으로 소중했던 그런 날이었다.

 

사회 적응을 하면서 한낱 종이 조각이 될 것에 다행히 사춘기는 무사히 건너뛸 수 있었다. 졸업 후 일찍 결혼하는 풍습으로 취업하는 쪽보다 주부가 되어 아이 엄마 친구들이 많았다. 국민학교 6년 중등 6년을 순식간에 보냈다.

 

버스를 타고 차장이 떠밀어 넣는 사이 교복 흰 카라가 구겨져서 울고 스타킹이 터져서 울고 펜팔로 나누는 싯구 한 줄에 울던 낭만도 있었다.

 

라디오에서 고교 야구를 즐겨 듣고 김재박 선동열을 응원했던 낮에는 졸음이 달아났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달콤한 오빠의 목소리는 밤잠을 잊게 했다. 단테의 신곡을 도서관에서 연장하며빌려 보고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학의 알지 못하는 내용에 빨간 볼펜으로 줄을 긋던 감수성이 많았던 학창 시절이었다.

 

동아리 활동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 음악 감상실에서 이어폰을꽂고 몇 시간 푹 빠져 있기를 좋아했다. 2시 김기덕 팝송 애청자로 왠만한 곡을 따라 부르기도했다. 노래 실력이나 서툰 발음은 그 때 익숙했던 습관으로 남아있다.

 

1991일 첫 출근 때 정장이 없어 세탁소에서 모직 롱코트까지 하루 빌려 입고 어울리지않는 숙녀복 차림으로 시작한 직장은 산업은행 본점이었다. 지금은 롯데 백화점 본점 자리이다.

 

이화여대를 가로질러 다니던 중학교 시절 때 김활란 여사 김동길 박사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 삶의 지침으로 메모했던 약속들이 자라면서 질풍노도의 시절에 아차 발이 수렁에 빠질 때마다 주문의 되고 암호가 되었다.

 

갈 수 없는 대학교를 매일 지나면서 멋진 여대생을 바라보며 빨리 성공하고 싶다는 시점만 잡아당겼다. 마을버스도 없던 때였다. 걸어서 다니던 그 길과 마포구에서 성동구까지 왕복 버스로 다니던 그 길에서 얻은 교훈들이 성인이 되면서 하나씩 담금질을 해 주었다.

 

산후풍 젖도 물리지 못하고 떠나신 어머니

 

▲ 산후풍으로 젖도 물리지 못하고 떠나신 어머니의 목소리나 손길을 모른다. 아버지가 두서너 번 새 엄마를 데리고 왔던 기억이 뜸뜸이 나는 어린 시절은 13살까지 우울했다.  


어린 날을 기억하며 나의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
. 다시 유년으로 돌아가는 시작점은 다시 오늘로 오늘 시작이다. 봄에 태어난 춘명은 어른들이 명은 길겠구나하는 덕담만 받았다.

 

그 이름은 왠지 쓸쓸하고 슬픈 느낌이 늘 있었다. 산후풍으로 젖도 물리지 못하고 떠나신 어머니의 목소리나 손길을 모른다. 아버지가 두서너 번 새 엄마를 데리고 왔던 기억이 뜸뜸이 나는 어린 시절은 13살까지 우울했다.

 

얼굴이 희고 눈썹이 흐리고 머리카락이 갈색이라서 엄마는 미국 갔다는 말을 철썩같이 믿고 대문을 열면 맞은편 먼 곳 김포 공항에서 비행기가 높이 떠서 가면 그 비행기 타고 올해 추석에는 올해 설날에는 엄마가 올 거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큰 길가 초록 아파트 5층이 그 때 가장높은 곳이었다. 친구가 그 곳에 살아서 놀러 갈 때면 옥상에서 어디쯤 미국일까 고개를 뽑고 더듬어 보던 나이었다. 복잿물 언덕을 넘어 금란 중학교를 다닐 때 어머니가 영영 오지 않는 것을 알고 첫 번째 반항기가 시작되었다. 버스 회수권 2장을 3장으로 교묘히 잘라 조금씩 용돈을 모으고 참고서 특별 활동비를 팔아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산동네 판자집 곤로를 피우며 밥을 하기 싫었고 새까맣게 그을린 냄비 닦기도 힘들었다. 저녁마다 반찬거리를 사러 가야하는 시장 길이 어린 걸음으로 참 지루했다. 그러다 친구를 만나면 멀리 피하고 집에 오다가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다른 골목 미로 속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미적미적 대기도 했다.

 

하루 두 번 연탄 갈기는 자다가 일어나야 하는 귀찮음보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방안에서 엄마와 노는 친구 그림자가 부러워서 핑계를 대다가 불씨를 얻으러 가는 벌을받기도 했다.

 

윗목이 없는 방에서 웃풍이 없는 집에서 고드름이 없는 지붕 아래서 버튼을 누르며 밥을 하고 인터넷 쇼핑으로 먹거리를 대충 메꾸는 지금 그 때의 나의 고민과 탈출이 그저 곱게 보이는 것은 그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아픔이어서 아름답다.

 


원본 기사 보기:해피! 우먼

광고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밴드 밴드 구글+ 구글+
기사입력: 2019/02/10 [02:09]  최종편집: ⓒ womansense.org
 
해피우먼 전북 영어 - translate.google.com/translate?hl=en&sl=ko&tl=en&u=http%3A%2F%2Fwomansense.org&sandbox=1
해피우먼 전북 일어 - jptrans.naver.net/webtrans.php/korean/womansense.org/
해피우먼 전북 중어(번체) - translate.google.com/translate?hl=ko&sl=ko&tl=zh-TW&u=http%3A%2F%2Fiwomansense.com%2F&sandbox=1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뉴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주간베스트 TOP10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倫理규정’-저작권 청소년 보호정책-약관정론직필광고/제휴 안내기사제보기사검색
로고 월드비전21 全北取材本部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가 1411-5, 등록번호 전라북도 아00044, 발행인 소정현, 편집인 소정현, 해피우먼 청소년보호책임자 소정현 등록일자 2010.04.08, TEL 010-2871-2469, 063-276-2469, FAX (0505)116-8642
Copyrightⓒwomansense.org, 2010 All right reserved. Contact oilgas@hanmail.net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