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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3.22 [18:01]
‘심야 달빛…으늑하고 용해된 내 그림자’
(POET VIEW) 林 森 '달빛 일기'
 
림삼/시인

 

 

 

  

 

 

 

'달빛 일기'  

 

 

  

 




 


 林  森

 

 

 

 

 제 철 문득

 밤하늘 가운데 달 저어기 떴건만

 처음 보는 달로 낯설게 있고,

 달빛 또한

거짓말같은 달빛으로 능청스레 있는데

 

 

 그 달빛에 어리어

 

밤 가지는 모습으로 용해된 내 그림자

 달빛입어 으늑하고,

 가고 옴 무상한 절기 심상 새겨져 있으니

 축시 흠씬 지나

 인시무렵에서 딱 제 격 된 양

 심야의 달빛은 기막힌 맛

 으뜸으로 내는가 보이

 

 

 이 맘 이미 절반도 넘게

 창살 밖 나가 섰으니

 뭉텅 잘라 꺼내놓았던 것인가 싶을 지경이어라

 그 새 달빛이 담뿍 제 것으로 삼아버리고

 어느 구름이 너른 별밭 죄다 쓸고 갔는지,

 

 

 하늘 기슭 어디에도

 쭉정별 하나 뵈지 않으니

 무슨 달빛이 이런 달빛이 있는가

 

 

 오냐!

 어딘가 쪽틈이라도 이지러진 달이었다면

 그건 아예 달도 아니었으리,

 다시금 밤하늘 우러러 넋 걸치고는

 망연한 눈으로 달빛에 빠져

 그 달 이우는 줄도 모르고 섰다가

 둥그러미 떠

 희웁스레한 달빛에서 아득히 헤어나 보니

 

 

 첫닭 우는 신새벽으로

 아글바글 하루의 살이 길 열리고 있구나

 

  

 

詩作 note

 

역사는 늘 새롭게 만들어지고 새로운 소재로 쓰여진다. 다시 말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원치 않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고, 과정 중에 불필요한 감정적 마찰 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특히 지역 감정이나 세대별 갈등, 빈부의 격차에서 비롯되는 오해나 남녀의 성차별로 야기되는 각종 문제가 심심찮게 유발되기도 한다. 바라지는 않는 현상이지만 이러한 다각적이고 변화무쌍한 여러 요인들이 섞이고 반죽되어 조화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역사의 태동 원리이다.

 

이러한 유무형의 요인들 중에서 현대사회의 장점만 추스르고 배열하여 일사불란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책무이며 생존의 이유다. ‘다니엘 튜더’라는 인물이 있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했고,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을 지냈다. 한국에서 11년간 생활한 다니엘 튜더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가 쓴 책의 제목은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이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내밀한 우리나라의 속사정을 신랄하게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얼굴 붉어지는 현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적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경제대국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집중했다. 그에 따른 대가는 ‘무한경쟁’이라는 강박 관념이다. 이런 경쟁은 먹고 살만 해져도 계속됐다. 단지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체면 인플레’, 새 것이라면 일단 손에 넣고 봐야 직성이 풀리는 ‘네오필리아’, 즉, 새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호증’, 외국에도 알려진 ‘성형수술 열풍’, 결혼 상대를 찾을 때조차 서로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엄친아 엄친딸의 신화’ 등은 이미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한국 사회를 끝없는 스트레스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다니엘 튜더가 보기에 대한민국은 그가 겪어본 그 어느 나라보다도 ‘경쟁적인 사회’이다. 그래서 사회 구성원들에게 너무도 가혹한 것이라고 평했던 것이다. 새롭고 발전적인 미래를 열어가는 역사를 이루어가야 하는 우리에게 이런 사회적 기조가 계속 만들어진다는 것은 결국 극도의 이기주의가 빚어내는 경쟁 일변도의 모습을 탈피하지 못한다는, 바람직하지 못한 귀결과 일치하게 된다. 나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 내 자식에게만은 좋은 것을 물려주고야 말겠다는 아집, 이런 극단적인 생각은 쓸모없는 부조화를 빚어낼 뿐이다.

 

이기주의의 첨단을 걷고 있는 현대인들의 마지막 남은 지성에 호소할 때다. 더 이상 헤매면서 갈팡질팡하다가는 순식간에 우리나라의 모든 형편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 결코 먼 이야기도, 남의 사정도 아니다. 어쩌면 자고 일어나면 바로 내일 시작될 역사의 경고인지도 모른다. 무조건 앞만 보고 나아가는 행보를 조금은 스스로 경계하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조화, 놓여진 여건과의 조율을 심각하게 고려해볼 때인 것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오늘 고른 시는 필자가 살아오면서 어쩌면 가장 어려운 지경에 처해있을 적에 답답한 심경과 갑갑한 현실을 한탄하면서, 잠 들지 못하는 심야에 달을 올려보며 지은 시다. 당시에는 그 위기만 극복하면 모든 것들이 다 순조롭게 풀려지고, 경험을 바탕으로 능수능란하게 세파를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지만, 세상사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모든 일상은 결국 고해의 연속이고, 사람의 삶이라는 건 언제나 새로운 역경과 고난에 시달리는 업보의 연속인 것을 깨닫는 데는 정말로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힘겨운 행보와 버거운 여로 속에서 작은 행운이나 행복을 분간조차 못하면서, 막연한 무언가를 캐내기 위해 무진 애를 쓰면서, 내일을 향한 걸음을 걸어야 하는 숙명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민낯이었던 것이다. 어느 산 속에 두 마리의 산토끼가 살고 있었다. 토끼를 노리는 천적이 많은 산 속에서 두 마리의 토끼는 서로를 위하며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양지바른 산 중턱에는 토끼들의 먹이인 클로버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 굶주릴 걱정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토끼의 먹이인 클로버 잎을 뒤지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숨어서 몰래 엿보던 토끼들은 사람들이 네 잎 클로버에 ‘행운’이라는 이름을 붙여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모습을 본 토끼 중 한 마리는 이후 네 잎 클로버를 찾아서 먹기 시작했다. “이것 봐. 오늘도 나는 행운을 찾아 먹기 시작했어. 어제는 열 개의 네 잎 클로버를 찾아 먹었지. 이제 나에게는 언제나 행운이 가득할 거야.” 그러나 다른 토끼가 보기에는 네 잎 클로버만 찾느라 다른 클로버를 잘 먹지 않는 친구의 몸이 점점 야위어 가고 있었다.

 

“네가 행운을 찾아다니는 동안 계속 약해지고 있잖아. 여우라도 만나게 되면 도망칠 힘도 없을 거야. 나는 그동안 평범한 클로버를 계속 먹어 이렇게 살도 찌고 다리에 힘도 있는데. 네가 네 잎 클로버를 ‘행운’이라 부른다면 나는 세 잎 클로버를 ‘행복’이라고 부르고 싶어.” 왜 주변에 널려있는 행복의 요소들을 멀리하고, 알 수도 없고 근원도 없고 불확실한 행운에 그리도 매달릴까? 진정한 가치가 행복에 있는지 행운에 있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한 세상인 걸까?

 

우리는 네 잎 클로버가 주는 뜻하지 않은 행운에서 얻는 기쁨보다, 우리 주변에 다양하고 풍부한 세 잎 클로버를 통해 더 안정되고 풍요로운 행복을 가질 수 있다. 행복이란 하늘이 푸르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 만큼이나 단순하지 않을까? 특출난 어떤 조건이나 주어지는 혜택을 막연하게 기다리거나 탐하지 말고, 우리의 가까운 주변에 널려 있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소망과 희망과 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결국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행복의 단초가 되어진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가 재능과 지식을 간직하고 발휘할 수 있는 소양을 타고 태어난다. 교육과 체험을 통해 그 근본적인 선물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을 살 수도 있고, 그것을 써보지 못하고 삶을 소비하는 어려운 일생을 이어가게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와 생각에 달려있다. 분명한 것은 외부의 어떤 상황이나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인한 결과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택도 실천도,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도 결국 스스로의 운명이고, 자신이 걸어갈 삶의 여정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격과 인성을 빚어내는 근원이다.

 

1942년, 파리의 길을 걷던 한 예술가가 길에 버려진 지 오래된 듯한 낡은 자전거 한 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예술가가 자전거의 안장과 핸들만 떼어 그 두 개를 붙여 놓으니, 마치 황소의 머리처럼 보이는 형상이 만들어졌다. 갸름한 안장은 황소의 얼굴을 형상화했고, 길고 구부러진 핸들은 황소의 뿔처럼 착각할 정도로 보였다. 예술가는 이렇게 만들어진 조형물의 표면에 청동을 입혀 질감을 더한 후 ‘황소 머리’라는 이름의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을 만든 예술가는 입체파 예술의 거장인 ‘파블로 피카소’였다. 아무런 볼품도 없는 자전거의 안장과 핸들이었지만, 피카소의 손에 의해 작품으로 만들어졌을 때는 새로운 가치가 부여된 것이다. 어떤 것이라도 만지는 사람의 손에 의해 그 가치가 다르게 결정된다. 사실 우리의 모습이 그러한 것 같다. 우리도 이미 하나의 훌륭한 작품이다. 하지만, 자신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 이제부터 자신을 귀하게 창조하는 피카소가 되어보자. 정말 위대하고 감동적인 모든 것은 자유 안에서 일할 수 있는 자들에 의해 창조된다.

 

우리 인생에서 분별력은 아주 중요하다. 지혜는 분별력이다. 선택하고 결단할 때 중요한 것은 분별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냉철한 머리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은 따뜻해야 하지만

 

머리는 차가워야 한다. 머리가 뜨거우면 분별력을 상실하게 된다. 분별은 차가운 머리로 해야 하지만, 사람을 품는 것은 따뜻한 가슴으로 해야 한다. 마음을 다스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마음에도 온도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의 온도를 잘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마음이 차가워질 때 우리는 교만해지고 완악해진다. 마음이 차가워질 때 사랑이 식는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진다. 행복도 불행도 마음에서 나온다. 사랑도 미움도 마음에서 나온다. 몸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잘 쓰는 것은 더 중요하다. 마음을 잘 쓰면 복을 받고, 마음을 잘못 쓰면 화가 임한다. 그러기에 우리 삶에서 분별력은 반드시 챙겨야 할 대표적인 덕목인 것이다. 베푸는 대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인과응보’의 법칙이다.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시간이지만, 월요일엔 길게만 느껴지는 한 주가 주말만 되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간다고 한탄을 하곤 한다. 처음엔 부담스럽기만한 월요일이었는데 주말이 다가올 때쯤엔 일주일이 너무 빠른 게 아니냐 하는 투정을 하게 된다. 짧게는 늘 바르고 다니는 핑크색 메니큐어가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바래는 것만큼, 길게는 일주일의 이 모순된 처음과 끝의 느낌처럼, 그렇게 인생에선 젊은 시절의 고통과 노력이 후엔 소중한 보물상자가 될테니까, 우리는 한 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어제의 두려움이 오늘의 용기가 될 수 있다는 것에 희망을 보아야 한다. 꼭 놓치지 않을 거라는 각오와 다짐으로, 매일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고 맺어야 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한지, 꼭 같은 일도 상황과 형편에 따라, 또 나의 입맛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따라 슬며시 웃음을 자아내게도, 때론 짜증스럽게도 하니 말이다.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까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우리 삶에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좋은 일은 좋은 일에 걸맞는 기쁨을, 나쁜 일은 또한 그에 상응하는 아픔과 고통을 통한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고통을 바라보면 고통스러우나,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교훈을 바라본다면 기꺼이 아플 일이다. 주말을 쉬고 나면 월요일의 시작이 더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일주일 시작하면서 근육을 약간 긴장한 상태에서 깊은 호흡을 두어 번 하고, 손끝과 발끝에 힘을 주고 온 몸을 힘껏 늘려 스트레칭을 좀 하면, 날 추운 데 체온 상승효과도 있고, 한 주를 시작하는 데 한결 힘이 날 것이다. 그렇게 건강하고 기쁜 한 주 열어 나가기를 바라면서 소중한 하루의 삶을 시작하자.

 

어느 날, 영화에서 마을 한가운데 서 있는 풍차를 보았다. 강한 바람이 불어와서 풍차의 바퀴가 빠른 속도로 돌더니, 바람이 멈추자 이내 멈춰버렸다. 풍차 바퀴의 운명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에 결정지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외부적인 원인 때문에 당신의 안전이 좌우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모든 힘의 원천은 바로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험하고 궂은 일을 당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곧잘 다른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원망과 변명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너무나 번번이 이루어지는 일인 동시에 너무나 무책임한 일이기도 하다. 모든 일의 시작과 과정과 끝은 나로부터 비롯해서 나에게로 귀결된다. 이 세상에서 나를 좌우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중요하다.  잘 되면 내 탓, 잘못 되면 남의 탓, 대개의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유별나게 남의 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몰라서일 수도 있겠지만 본인의 잘못일 경우,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 앞에 자신의 잘못이 노출되는 것이 부끄럽거나 혹은 자신에게 돌아올 힐책이 두렵거나 하는 등의 이유일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만약 어떤 기계가 고장이 났을 때에 고장 난 부분이 아닌 다른 부분을 수리해서 그 기계가 다시 작동을 할 수 있을지를 말이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무엇이 문제점인지를 본인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던가, 혹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아니하고 스쳐지나가서는 개선의 여지는 없는 것이다. 무언가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기 보다 우선 나의 주변을 살피고 본인의 문제점을 직시함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 그것 또한 인생을 바라보는 겸손의 모습은 아닐런지.

 

텅 빈 항아리와, 아무것도 돌려 있지 않은 빈 과반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어느새 텅 비게 된다. ‘무념무상’, 무엇인가를 채웠을 때보다 비웠을 때의 이 충만감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던가? 텅 빈 충만의 경지다. 우리는 늘 빈 그릇에서 배운다. 필자가 예전 어머니한테 곧잘 얻어듣는 핀잔이 있었는데 바로, “워째 너는 그릇이 그것 밖에 안되냐?”였다. 대부분 순간을 못 참고 꼬라지를 피울 때 하시는 말씀이었다.

 

그릇이 너무 작아 작은 돌부리 하나 캐어 담을 구석이 없어서 있는 대로 토설한다는 뜻인지, 아는데 나이를 먹어도 고쳐지지 않는 이 못된 성정의 그릇은 어떤 크기인지, 어떤 모양새인지, 태어날 때 얼추 비슷한 모양의 그릇을 받았을텐데, 살아가면서 누구는 텅 비어있음에 충만함을 느끼고, 누구는 더 담지 못해 불행을 입에 달고 살고, 또 누구는 필자처럼 비어버리지도 담지도 못하는 얼뜨기 그릇으로 만들어버렸나 보다. 그릇이 크다고 좋거나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작다고 나쁘거나 부족한 것만은 아닌, 어떤 모양새이든지 비울 때도 채울 때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이었으면 좋겠다.

 

사람이나 사물을 볼 때 장점보다는 단점이 자꾸 눈에 띈다면 자신의 사고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자. 인간 사회가 완벽할 수는 없다. 결점이 있게 마련이다. 본인이 취할 점만 취하고 나머지는 보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성격상 굳이 그걸 끄집어내서 고쳐주려고 한다. 그러지 말자. 어떤 모임이나 단체든지 반드시 배울 것이 있다. 그 배울 점만 배우면 되는 것이다. 굳이 남을 고쳐주고 싶다면 자신을 먼저 바꿔서 그 향기가 주위에 퍼져나가도록 하자.

 

나는 변하지 않은 채 남을 바꿀 수는 없다. 사람은 감동을 받지 않으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억지로 바꾸려는 건 에너지 소모일 뿐이다. 설령 자신이 어떤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는 아니라 하더라도, 비록 모자라 그의 슬픔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서 힘들고 아플 때 곁에서 손 잡아주거나 부르면 달려가 안아줄 수 없다 하여도, 무료하고 한가한 시간에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시고 극장엘 가고 산책을 하는 따스한 일상을 나누지도 못하고, 우연히 여유로운 시간이 되면 얼른 전화를 할 수는 없어도, 혼자 있는 시간에 혹시 외로움을 느낄 때 가만히 불러보고 싶은 사람이 되어보자.

 

마음 가득히 정을 띄워 그의 곁을 떠도는 공기로 바람으로 노래로 머무르면서, 부디 혼자 아파하지 말고, 혼자 외로워하지 말고 혼자 울지 않기를 바라며, 서로 의지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어보자.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순 투성이이며, 아름다움과 추함, 행복과 불행은 시시각각 공존하고 있다. 세상 모든 사물과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우리들이 보는 시각에 따라 변한다. 꽃 중의 왕으로 불리우는 장미를 볼지언대,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장미에 하필 가시가 있다고 불평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가시덩굴 속에서도 아름다운 장미가 피어났다고 감탄할 수도 있다. 같은 사물이지만 보는 각도가 다르면 다르게 보이고, 아무리 험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고운 눈으로, 예쁜 마음으로 본다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싶다. 밝은 생각과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꽃동네로 보이고, 녹이 슨 마음과 뒤틀려진 심사로 보면 안개 자욱한 오염된 도시로 보일 것이다. 이젠 마음을 깨끗이 닦아보자. 세상은 아직도 그래도 살기 좋은 아름다운 곳이다.

 

단 하루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지난 일들을, 지난 시간들의 역사를 마음으로 열어 간직할 것은 담고, 좋지 않았던 일들의 기억은 거침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딸려 보내야만 새로움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그 시작은 미래의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매일 새롭게 시작되는 빈 노트에 무엇을 써야 할지 생각을 하자. 우리의 미래는 활짝 열려있다. 작은 계획이라도 열심히 잘 실천하고 더울 때 시원하게, 추울 때 따뜻하게, 그렇게 살아가자. 그러면서 아름다운 달빛 아래 달빛 일기를 적어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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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2/27 [02:54]  최종편집: ⓒ womansen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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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솔 19/02/27 [09:51] 수정 삭제  
  좋은 시와 시작노트 잘 읽었습니다.
배둘레햄 19/02/27 [10:00] 수정 삭제  
  단 하루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지난 일들을, 지난 시간들의 역사를 마음으로 열어 간직할 것은 담고, 좋지 않았던 일들의 기억은 거침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딸려 보내야만 새로움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그 시작은 미래의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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