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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1.03.03 [14:17]
<土曜隨筆>홍혜랑 ‘변덕의 여정(旅程)’
“끊임없이 영혼을 채굴해내는 전위예술”
 
수필가 홍혜랑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예술가

  

▲ 수필가 홍혜랑    

살아생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예술가가 역사 속엔 적지 않다. 빈센트 반 고흐도 살아있는 동안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한, 전혀 인정받지 못한 화가였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물감 걱정을 해야 했고, 평생 동안 좌절과 고독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 자신이 예언한 바는 없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백 년쯤 지나고 난 2015년 한 해 동안 미국의 소더비 경매에서 팔린 가장 비싼 그림 다섯 작품 중 두 작품이 고흐의 것이었다고 한다.

 

족보 없는 아마추어 철학가, 광기의 산문가 정도의 취급을 받던 니체의 저서들은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바이블처럼 떠받들려지고 있다.

 

1900년에 세상을 떠난 니체는 당시 자신의 반시대적 인간 통찰이 온 인류의 정신을 이렇게 뒤흔들어놓을 것을 얼마나 확신했으면 내가 세상을 떠난 후 백 년만 기다려보라. 인간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탁월한 천재가 나타나서 니체라는 사람을 무덤에서 발굴할 것이다. 수준 높은 작품이 이해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며 제대로 읽혀지려면 수 세기가 필요하다.”라고 예언했을까.

 

 

작품 스스로 달라질 수는 없을 터

 

당대에는 주목받지 못하던 작품들이 어찌하여 시간이 지나면 세기의 명작으로 빛을 보는 건지 늘 궁금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작품 스스로 달라질 수는 없을 터. 달라지는 것은 작품 안에 있지 않고 작품 밖에 있을 것이다.

 

하나의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은 일정한 시점에서 완전히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 해석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다. 해석의 근거는 시간이다.”라는 해석학의 목소리를 음미해본다.

 

시간이 해석의 근거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해석의 주체는 시간 안에 살고 있는 인간뿐이라는 의미다. 당대의 공시적(共時的) 해석이 백년 후의 통시적(通時的) 해석과 다른 이유는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인간 영혼의 오감(五感)이 시시때때로 변하기 때문인 것이다.

 

괴테는 스스로 색채론연구에 반평생을 붙들렸었다. 그 정도의 시간이면 여섯 편 정도의 문학작품을 더 쓸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도 후회하진 않는다고 했다.

 

사람의 눈은 동일한 색채에 머물러있기를 좋아하지 않고 즉시 다른 색채를 요구한다. 그 요구가 어찌나 강한지 실제로 다른 색채를 찾아낼 수 없을 경우에는 자체적으로 그러한 색채를 만들어낼 정도다.”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색채론에 몰입했던 괴테는 자신의 색채론에 이런 말도 남겼다. “색채에 대한 눈의 감각뿐만 아니라 정신적 본질에서도 마찬가지다. 색채론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대상을 직시한다. 그런 사람은 하나의 이론을 뒤쫓아가는 불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 관점주의가 지배적인 오늘날이지만, 전위예술만큼 다양한 해석에 휘둘리는 장르도 없을 것이다.   

 

전위예술만큼 다양한 해석

 

하나의 이론을 뒤쫓아 가는 불행을 가장 강력하게 거부하는 예술이 전위예술 아닐까 싶다. 백남준의 유치원 친구인 선배 수필가로부터 백남준 이야기가 담긴 산문집을 받았다. 선배가 유치원 친구 백남준과 유지했던 인간관계를 보면서, 괴테가 폰 스타인 부인과 유지했던 관계도 떠올랐다.

 

선배의 책 속에 담긴 인간 백남준을 만나면서, 이 독특한 예술가의 작품이 세계인들에게 경이의 대상이 되는 힘이 무엇일까 새롭게 관심이 솟았다.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에는 정답이 없다.’는 관점주의가 지배적인 오늘날이지만, 전위예술만큼 다양한 해석에 휘둘리는 장르도 없을 것이다.

 

피아노를 때려 부수던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아직도 해석이 분분하다. 쇼팽을 연주하던 백남준이 갑자기 피아노를 때려 부수자 당시 청중의 반응은 엇갈렸다. “인습과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강렬한 발상이다. 기껏 쇼팽의 피아노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깨어있어라.

 

깨어남은 비움이다. 비움이 있고서야 본질을 만나는 존재론적 삶이 가능하다.”는 팬들이 있는가 하면, “백남준이라는 이름을 빼면 그건 미친 짓이라며 등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백인 백색의 해석을 끌어내는 데에 성공한 이 무대를 전위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는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을 전시해놓은 기념관에 가보니 미친 짓 같아 보이는 작품들이 여럿 있었다. 공중에 걸려있는 부처의 머리, 뿔 달린 황소의 머리토막, 철조망으로 묶여있는 피아노 건반 등 눈앞에 펼쳐지는 갖가지 표현물들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지 막막했다.

 

인간의 영혼에 들어갔다 나오면

 

예술의 대상이 이토록 한계가 없을 수 있을까, 이런 것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을 품은 채 해석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장르라는 칸막이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데에 가당치 않은 구속임을 절감한 백남준은 몸으로, 설치로, 행동으로 그토록 다양하게 표현을 시도한 것일까. 그의 설치예술, 행위예술이 예술이라는 이름을 갖게된 연유를 생각해본다.

 

자연이 일단 인간의 영혼에 들어갔다 나오면 더 이상 자연이 아니고 예술이 된다. 그런데 그 어떤 천재예술가도 자연 속에서 포착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이라는 깨달음을 가장 체험으로 만나는 사람이 예술가 아닐까. 누구보다 강렬한 열정의 주인공이 전위예술가라면, 기행이든 파행이든 그들의 표현은 인간 정신의 넓이와 깊이를 그만큼 확장하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탐구를 향한 백남준의 정직한 열광은, 몽골초원을 떠나 종횡무진 말 잔등에서 지구를 누비던 칭기즈칸의 노마드적 행보를 연상케 한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던 지난 2000년도에 미국의 언론 워싱턴 포스트에서는 과거 천년 동안 인류의 삶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을 선정했는데 놀랍게도 뉴턴도, 아인슈타인도 아닌 칭기즈칸이었다.

 

영혼의 유목민 백남준의 신기(神氣)가 예술이라는 초원에서 때를 만났고, 세계인은 그의 예술에 주목한 것이다. 유럽예술의 아방가르드 사조가 인간의 이성, 신의 전능에 대한 해체를 시작한 지 오래다. 나이 열여덟 약관에 해외로 나가 서구의 전위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작품 활동을 하던 백남준이 그들보다 더 전위적인 유목민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인류의 문화사 속에서 고전주의, 계몽주의, 낭만주의 등 시대의 이름이 바뀌는 것은 인간의 정신 한쪽 면에 초점을 맞추는 변증법의 순환 아니겠는가. 그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추어도, 볼 수 있는 건 언제나 한쪽 면뿐이라는 것이 예술가의 한계다.

 

존재론적 인간탐구라는 명제에서 보면, 목적론적 사유에 사로잡힌 고전주의보다, 개인의 주관적 감성에서 가장 인간다움을 발견한 낭만주의보다 그리고 그 무슨 무슨 정형들보다 오히려 인간 존재를 미정형으로 남겨놓은 채, 끊임없이 영혼을 채굴해내는 전위예술이 인간의 본래 생김새에 더 충실한 탐구가 아닐까.

 

피카소가 보여준 미술에서의 큐비즘이 그래서 놀라울 뿐이다. 전위예술은 변천하는 예술사의 한 획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해서 인간 영혼의 신대륙을 찾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역동적 에너지 그 자체다. 그 어느 시대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는 전위예술은 시대와 갈등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외곽의 존재 지평에 눈이 닿아있을 뿐이다.

 

아방가르드 하면 시대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겉멋 들린 반체제쯤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변방으로 제껴놓던 안일한 획일주의를 호흡하며 나는 어른이 되었다. 목적론의 레일을 탈선하면 그것이 곧 타락인 것처럼 굳어있던 내가 이제 변방에 서 있는 느낌이다. 달랑 원고지 한 장 들고 글을 쓰겠다고 덤벼드는 나는 인간을 알기 위해, 나를 알기 위해 충분히 혹독하게 방황했던가. 전위예술가 백남준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 같았다.

 

예술은 사기라고 말한 백남준의 실토를 새겨본다. 일찍이 톨스토이도 자신의 문학에 대해 똑같은 고백을 했지만, 고백의 내용은 같지 않다. 예술은 사기라는 백남준의 선포는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명멸하는 혼돈을 그 무엇으로 표현해도 그대로 담아낼 수 없는 한계를 표현한 것 아닐까 상상해본다. 영혼의 망망대해를 목숨 걸고 항해해 본 사람만 할 수 있는 선언이다.

 

고흐의 그림에 대한 당시의 해석과 오늘날의 해석이 다른 것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니다. 니체의 책들이 오늘날 인류의 혼을 빼앗는 양서가 된 것도 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 아니다. 끊임없이 다른 색채를 요구하는 인간의 눈, 인간의 모순적 인식욕 때문이다. 해석의 근거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다면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작가가 인류를 위해, 세계를 위해 고뇌하며 글을 쓰지만, 따지고 보면 상황 속에 갇혀있는 자신의 만들 어진 생각을 적는 것이다.

 

한 생각이 밀려나면 다른 생각이 들어앉는다. 변증법은 시간의 순환이 아니라, 모순의 존재 인간이 자연이 라는 선험의 세계를 향해 걸어가는 영원한 변덕의 여정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인식작용은 거기까지다.

 

나는 지금 어느 별자리 밑에 발 딛고 서 있는지 살수록 혼미의 몸집만 불어난다. 수필 한 편을 쓰는데 지리멸렬할 만큼 시간이 길어진다. 삶을 시작도 못 하고 떠난다는 선인들의 탄식을 따라하게 된다.

 

 

프로필

-수필가. 1994한글문학수필 부문으로 등단

-2015한국산문1회 평론으로 등단

-에세이집 이판사판(理判事判), 회심의 반전.

-26회 현대수필문학상, 10회 조경희수필문학상 수상

-수필문우회 운영위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기획위원.

 

 

 


원본 기사 보기:해피! 우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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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2/14 [01:36]  최종편집: ⓒ womansen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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