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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1.04.10 [17:34]
<土曜隨筆> 정진희 ‘가면’
“가면을 써야 할 때와 벗어야 할 때”
 
수필가 정진희

귀족과 동등하게 어울릴 수 있는 기회

  

▲ 수필가 정진희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근처의 미로 같은 골목길엔 가면 가게들이 많다. 반짝이는 금박과 은박, 화려한 색상의 깃털과 보석으로 장식한 갖가지 가면들은 모두가 그대로 예술작품이다. 그 상점 앞에서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 명, 한 명 살아있는 사람처럼 영혼이 깃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손을 내밀면 스르륵 움직일 것 같기도 했다. 또 내게 말을 걸어올 것 같기도 해, 일순 내가 쓰고 있는 가면 뒤의 속내를 들키지나 않을까 거북한 마음이 들었다.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려는 듯 필요 이상으로 치장한 가면들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넋을 잃고 말았다.

 

베네치아에 화려한 가면 상점이 많은 것은 베네치아 카니발때문이다. 13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은 사순절(四旬節, 부활절 전 40일간 금욕으로 참회하는 기간을 가리킨다. -편집자 주)전에 실컷 먹고 즐기기 위해서 신분과 지위를 감추는 도구로 가면을 쓰게 했다. 그것은 점잖은 귀족에겐 마음 놓고 망가질 수 있는 자유를, 평민에겐 귀족과 동등하게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효과적인 장치였다.

 

그러나 민낯으로는 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이 지나쳐 방탕의 수준에 이르자 1658년에 가면을 금지하게 된다. 신 중심의 사회에서 억눌린 인간의 욕망이 건전하게 분출되기란 쉽지 않았을 거다.

 

가면 뒤에 숨어 자유와 평등의 기회를 방종 내지 악용한 경우이다. 그러다 현대에 이르러 1979, 베네치아 가면 축제는 다시 부활하여 지금은 세계 3대 축제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베네치아 가면처럼 화려한 가면을 이용한 TV 프로그램 복면가왕을 좋아한다. 모두 가면을 쓰고 노래를 한다는 것이 이 프로의 매력이다. 얼굴을 보면 기존의 선입견이나 편견에 사로잡히기 마련인데 이름을 감추고 가면을 쓰니 온전히 노래 실력으로만 평가받는다.

 

부르는 사람은 노래에 집중하게 되어 평소보다 나은 실력을 발휘하게 되고, 시청자는 오롯이 노래에 집중함으로써 노래의 깊은 맛을 감상할 수 있다. 가면을 쓰고 노래한 후 실력만으로 평가를 받게 된 그들은 자신감을 회복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행복해 한다.

 

그중 오랜 무명의 세월을 털어내고 인기 가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을 보면 예능프로인지 감동 다큐인지 헷갈리지만, 나도 덩달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촉촉한 감동에 젖는다.

 

그동안 가면이라 하면 뭔가 속이려는 의도가 느껴져 불신하는 편견이 있었는데, 현상만으로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가면의 또 다른 기능을 발견한 것이 신선했다. 이런 프로를 통해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공정한 판단, 부적절한 평가와 함께 선입견이나 편견이라는 부당한 시각도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  가면은 내게 추상명사로 더 익숙하다. 나는 자애로운 엄마, 현명한 아내, 친절한 이웃,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장소와 때, 상대방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며 살아간다. PHOTO 필자제공

 

가면의 기본 기능 무엇보다 감춤

 

가면의 기본 기능은 무엇보다 감춤일 것이다. 더 아름답기 위해, 혹은 나만의 개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집단 사회에서 규범과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가면을 씀으로써, 우리는 페르소나( persona, 개인이 사회생활 속에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지 않기 위해 겉으로 드러내는, 자신의 본성과는 다른 태도나 성격-편집자주)로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가면은 내게 추상명사로 더 익숙하다. 나는 자애로운 엄마, 현명한 아내, 친절한 이웃,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장소와 때, 상대방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며 살아간다.

 

본질과 전혀 다른 것은 아니 지만 의상에 따라 장신구를 바꾸듯 적당한 꾸밈이 있는 가면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일까 역설적으로 거친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을 만나면 신선하기도 하지만 불쾌할 때도 있다.

 

그런대로 나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역할을 잘해준 가면들이 있는가 하면 정말 쓰고 싶지 않은 괴로운 가면도 있었다.

 

은행에 출근하던 20대에서 30대까지, 은행 문을 들어서는 순간, 나와는 다른 가면을 써야 했던 우울한 날들이 떠오른다. 혼자 있길 좋아하고 내성적인 나는 사람들과 웃고 얘기하는 일이 어려웠다.

 

그런 나를 감추고 모든 사람에게 먼저 웃고 상냥하게 인사해야 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퇴근할 때면 등 뒤에서 닫히는 철문이 지옥문처럼 여겨졌다. 그제야 가면을 벗고 로 돌아가는 시간에 느낀 해방감과 행복감은 또 다른 우울이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말을 웅얼거리며, 내가 원치 않는 가면 속으로 함몰되지 않으려 발버둥 쳤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형식이 내용을 주도한다고 했던가. 그 가면에 맞는 역할을 오래 수행하다 보니 내면의 우울이 많이 희석되고 오히려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뀐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인생에는 무익한 것이 없다고 하는가 보다.

 

가면을 써야 할 때와 벗어야 할 때가 있다. 오롯이 로 돌아가는 시간, 혼자만의 시간엔 가면을 벗고 나의 맨 얼굴을 본다. 본래면목(本來面目, 자기 본래의 모습)에 집중한다. 비뚤어진 고집, 거친 생각, 불안한 욕망들이 풀처럼 눕는다.

 

아무런 가면 없이 모든 역할을 무난히 수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생은 연극이 아니라 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베네치아에서 만난 가면들 중 하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가면을 벗어!”

 

프로필 / ‘한국산문발행인,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장 역임 /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문인협회 이사 / 저서: 26인의 작가 대담집 외로운 영혼들의 우체국’, 수필집 우즈강가에서 울프를 만나다’ ‘떠나온 곳에 남겨진 것들. / 남촌문학상, 조경희수필문학상 신인상, 한국산문문학상 외.

 

 


원본 기사 보기:모닝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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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2/21 [02:57]  최종편집: ⓒ womansen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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