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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1.04.10 [17:34]
<역사의 흔적> 유영봉 ‘천년고도 경주를 찾아서(8회)
 
유영봉 한문학자
▲ 단석산 마애석불군    


 단석산과 옥산서원

 

▲  유영봉 한문학자

딴에는 바쁜 날이었다. 오전에는 단석산(斷石山), 오후에는 옥산서원, 밤에는 경주 시내의 야경을 보러다녔다.

 

예정대로 먼저 단석산에 올랐다. 단석산이란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처음 나온다. 이 책에서는 단석산을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하며, 경주 중심지의 서쪽 23리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덧붙여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자 신검(神劍)을 얻어, 월생산의 석굴 속에 숨어들어가 검술을 수련하였다. 칼로 큰 돌을 베어 산더미 같이 쌓였으니, 그 돌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함께 담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년(서기 611) 공의 나이 17세에 고구려·백제·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쳐들어온 적을 평정하겠다는 뜻을 지니고, 홀로 중악(中嶽)의 석굴로 들어가 몸을 깨끗이 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때 중악을 월생산 또는 단석산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데, 대구 팔공산 주변의 중암암과 홍류암에서도 김유신의 수련처가 자신들의 암자라고 주장한다. 아무튼 단석산에 관한 설화는 이후 경주와 관련한 지리지에 계속해서 출현한다.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기에 공원지킴이초소까지 차를 몰고 올라갔다. 너덧 대 가량 주차 가능한 공간이 텅 비었다.

 

차에서 내려 가파른 포장도로를 헉헉거리며 올랐다. 얼마 후 일직선으로 굽은 도로가 왼쪽으로 꺾어진다. 더욱 가팔라진 길이니, 사륜구동의 차량이 아니면 올라오지 말라는 경고가 길가에 나붙었다.

 

숨이 턱턱 차올랐지만, 생각을 바꾸어 저 아래 계곡에서부터 정상까지 걸어올랐을 화랑들을 상상해보았다.

 

이 길을 오르내리기만 해도 저절로 체력훈련이 될 듯싶었다. 어느 결에 화랑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가르침 삼아 문무의 연마에 힘 쏟는 그들의 우렁찬 소리였다. 덩달아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신선사(神仙寺)가 돌연 다가왔다.

 

신선사는 작은 절이지만, 국보 제199호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으로 유명한 곳이다. 마애불상군은 본존불이 8.2m나 되는 아주 큰 규모인데, ㄷ자형의 자연 석실 안이다.

 

동북쪽의 홀로 선 바위 표면에는 깊은 돋을새김을 한 여래입상이 본존불로 섰다. 하도 커서 고개를 번쩍 쳐들어야만 상반신을 올려다볼 수 있을 정도다. 둥근 얼굴에 고졸한 미소를 머금고, 두 손으로 시무외(施無畏)와 여원인(與願印)을 지었다.

 

동쪽에 새겨진 보살입상은 왼손을 들어 가슴에 댔고, 오른손으로 보병(寶甁)을 들었다. 남쪽의 보살입상은 마모가 심한데, 이 또한 삼존(三尊)의 구성에 일익을 담당했다.

 

이 보살상의 오른쪽에는 경주상인암조상명기(慶州上人巖 造像銘記)’라는 제목 아래 400여 글자가 음각되었다. 이 가운데 神仙寺 作彌勒石像一區 高三丈 菩薩二區(신선사 작미륵석상일구 고삼장 보살이구)”라는 문구가 보인다고 한다.

 

북쪽에는 모두 7구의 불보살상과 인물상이 상하 일렬로 야트막하게 부조되었다. 특히 아래쪽에는 본존불을 향해 일렬로 걸어가는 인물상 2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새겨진 동안(童顔)의 여래상 1구가 눈길을 끈다.

 

이 가운데 인물상 2구는 버선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긴 저고리에 통바지 닮은 하의 차림이다. 손에 각각 향로와 나뭇가지를 들었으니, 공양상이 분명하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단석산 정상에서는 김유신 장군이 단칼에 반 토막을 냈다는 바위가 드는 손을 반겼다.

 

멀리 경주 시내가 내려다보였는데, 그 옛날 화랑들도 이곳에 올라 조국의 심장부인 저 경주를 꼭 지켜내고, 마침내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길 저마다 다짐했으리라. 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환했다.

 

오후에는 옥산서원으로 갔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 14911553) 선생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1573(선조 6)에 창건된 서원이다. 사액 서원이기도 한데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곳 가운데 하나다.

 

서원은 맑고 시원한 냇물을 끼고 자리를 잡았다. 선생께서 관어대(觀魚臺탁영대(濯纓臺세심대(洗心臺징심대(澄心臺영귀대(詠歸臺)라고 명명한 천변의 오대(五臺) 가운데 서원은 세심대를 차지했다. 세심대는 용추에서 떨어지는 맑은 물로 마음을 씻고, 싱그러운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연마하는 곳이란 뜻이 담겼다.

 

아무튼 이곳은 검은 바윗돌이 널찍하게 펼쳐지고, 주변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그늘을 드리우는 곳이다. 지난날 한여름을 맞은 젊은 선비들이 심성을 도야하며, 우렁우렁 유교 경전을 읽었던 곳이다. 한가하게 천변을 거닐면서 한시를 읊조렸던 곳이다.

 

문득 영귀대란 이름의 배경이 된 논어(論語)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에게 뜻하는 바를 묻자, 대부분의 제자들이 정치적인 욕망만을 내비쳤다.

 

그러나 내내 비파를 타고 있던 증점(曾點)늦봄을 맞아 봄옷이 완성되면, 관을 쓴 젊은이 대여섯과 아이들 예닐곱을 데리고서,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뒤 노래하며 돌아오겠다.”고 답하였다. 이에 공자는 감탄을 하며 나는 증점과 함께하겠다.”라고 하였다.

 

서원의 위쪽으로 올라갔다. 선생께서 41세가 되던 1516년에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독락당(獨樂堂)이 등장한다. 자옥산(紫玉山)이 큰 팔을 벌려서 품고 있는 형세다. 근실한 성리학자의 거처답게, 아주 단정하고 말끔한 모습이다.

 

마루 쪽에서 바라보이는 계곡은 차라리 한 폭의 그림이었다. 선생의 독립 공간이었던 계정은 운치가 더욱 흘러넘쳤다. 며칠간 이 정자에 유숙을 청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싶은 욕망이 절로 솟았다. 계정(溪亭)이란 글씨는 한석봉의 필체다.

 

선생의 높은 학문과 고결한 인품을 흠모하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는 뒷날 이곳을 찾아와 계정이란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읊었다.

 

시냇물 맑기가 마치 거울 같고

초가집 좁기가 배 닮았는데

헛된 꿈에서 막 돌아와

애오라지 소승의 선을 닦는다오

밥알 던져 물고기가 먹는 걸 보고

노래 멈춰 백로가 잠들길 기다리며

사립문짝 종일토록 닫아건 채

홀로 앉아있어도 마음 유연하다오

 

溪水淸如鏡(계수청여경) 茅堂狹似船(모당협사선)

初回大槐夢(초회대괴몽) 聊作小乘禪(요작소승선)

投飯看魚食(투반간어식) 停歌待鷺眠(정가대로면)

柴門終日掩(시문종일엄) 孤坐意悠然(고좌의유연)

 

밤에는 불빛 밝힌 금장대(金藏臺)와 첨성대, 동궁과 월지, 월정교(月淨橋)를 하나씩 찾아다녔다. 인적 끊긴 금장대는 경주 시내의 야경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방문객이 부쩍 줄어든 첨성대는 밝기를 낮추었고, 동궁과 월지는 밤을 맞아 더더욱 화려해졌다.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瑤石公主)의 사랑 잇던 문천(蚊川)의 월정교에도 불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옛날 원효 대사가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내줄 건가? 내가 하늘 떠받칠 기둥을 만들리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다녔다고 한다.

 

이 노래를 들은 태종 무열왕은 그 안에 담긴 뜻을 알아채고, 신하 하나를 시켜 대사를 공주에게 보내도록 일렀다. 그때 마침 대사가 남산에서 내려와 월정교를 지나다가, 멀리서 자신을 찾는 신하를 보고 다리 위에서 문천으로 몸을 던졌다.

 

깜짝 놀란 신하는 흠뻑 젖은 대사를 부랴부랴 월정교 바로 옆에 있던 요석궁으로 모시고 가 옷을 말리게 하였으니, 대사는 자연스레 공주 곁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때 얻은 아들이 바로 설총(薛聰)이라고 한다. 월정교는 문천교(蚊川橋)라고도 부른다.

 

찰나 같은 시간 속에 2,000년이 훌쩍 흘렀는가? 불빛에 물든 경주에서의 마지막 밤 역시 막걸리 2병이 꼭 필요했다.

 

필자 유영봉(劉永奉) 중동고등학교와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를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한국한문학 전공)를 취득하고, 현재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고려 문학의 탐색, 하늘이 내신 땅(), 당나라 시인을 만나다, 너도 내가 그립더냐. 천년 암자에 오르다등이 있다.

 

역서로는 국역 무의자 시집, 완역 청구풍아(), 집현전 학자 여섯 사람이 안평대군께 바친 시등이 있다.

 

 


원본 기사 보기:모닝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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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3/29 [23:31]  최종편집: ⓒ womansen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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