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기도?
“그분 기도할 때 뭐라는지 들었어?” “아, 유명하지, 늘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기도? 하하하”
새벽기도 시간, 맨 앞에 앉아 누군가를 혼내달라고 한다는 어느 할머니 이야기다. 며느리나 이웃, 또는 자녀들이 서운하게 한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고하며 주위의 누군가가 자기를 괴롭힌다는 말도 빼놓지 않고 아뢴 다음, 꼭 자기 대신 혼 좀 내주십사고 간절히(?) 두 손 모으며 고개를 조아린다는 것이다.
오래 전에 그 이야기를 듣고 같이 웃기는 했지만 울림도 있었다. 내용은 좀 그렇지만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드러낸 날것의 기도가 어쩐지 신선했다. 기도를 어렵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오히려 길 하나 찾은 것 같았다.
누군가는 아이들이 갖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 아버지를 조르듯 하는 것이 기도라 했다. 우리가 비는 대상인 신(神)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을 때면 마음이 약간 가벼워진다.
기도 하면 먼저 떠오르는 광경은 일단 무릎 꿇은 자세다. 그 순간은 마음속의 우물, 그 심연으로 내려가야 한다. 웅숭깊은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동그란 하늘, 그리고 한데 모아지는 빛. 그때 비로소 기도의 절실함은 발현된다. 경건함은 필수조건이다.
그리고 몰입. 오로지 일 대 일로 대면하여 나도 잊고 주변도 의식하지 않은 몰아의 경지에서 자신을 던져야 마음의 원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바라는 것을 얻을 때까지 천사와 씨름을 한 야곱처럼 사생결단을 해야 하는 일이다. 불교의 삼천배도 육신의 고통으로 정신을 벼리며 온몸과 마음을 바치는 절실한 발원이다.
나름대로 그런 선입감을 가진 탓이기도 하고 별로 종교심이 없는 나는 기도가 어렵다. 우선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도 못하고 머릿속은 늘 잡념이, 해질 무렵 들판의 하루살이처럼 어지럽다.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면, 이거 진심인가 의심스럽고 자신을 위해 기도하면 좀 이기적이지 않나 싶다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나 친지를 위해 기도할 때는 혹시 들어주지 않으면 어쩌나 근심하는 식이다. 대상을 향해 오롯이 올라가야 할 기도가 말도 안 되게 뜻 없이 귓가를 맴돌아 내가 듣고 있다.
긴 시간 기도하는 사람에게 내용이 궁금해 실례를 무릅쓰고 물어볼 때도 있었다. 순서대로 하다 보면 그렇게 길어진다는 것이다. 순서는 대체로 세계평화에서부터 나라와 민족, 자기가 속한 단체, 그 단체의 장에서부터 차츰 주변으로 넓히다 보면 그 시간도 길지 않다는 것이다.
하긴 남을 위한 기도가 우선이니까. 하지만 나로서는 너무 정해진 루틴 같아 마치 미리 작성한 원고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믿음도 약하고 에너지도 딸려 그런 정성 가득한 기도를 못하는 걸까. 기도의 정석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와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 기도를 방해할 때, 감사와 섭리의 근원을 찾으면 평정이 온다. pixba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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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기도해야지…‘대답에 힘이 없다’
얼마 전에 기도부탁을 받았다. ‘그래, 기도해야지’ 하면서도 대답에 힘이 없다. 내심 걱정스러운 것이다. 병세가 위중한 친구의 언니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기도발 약한 내가 무슨 힘이 될까. 너무 오래 고통을 받지 않으셨으면 하고 바라는 게 고작이었다.
기도는 단순히 종교적 행위라고만 볼 수 없다. 특별히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도 기도하는 마음을 딴 주머니 차듯 감추고 있다. 산길을 갈 때 하나쯤 준비해야 할 지팡이다. 그만큼 우리는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삶을 살고 있음이다.
누구 못지않게 기도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일들은 차고도 넘친다. 내 일도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의 안위, 나와 상관없는 것 같지만 미얀마 사태, 코로나로 인한 많은 문제들도 당연히 기도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손 놓고 있다. 마치 빚만 잔뜩 지고 있는 기분이다.
기도에 관한 나의 강박증은 뜻밖에도 오지여행가 한비야 씨가 해결해주었다. 그녀의 책을 읽다가 ‘화살기도’란 단어에 눈이 번쩍 뜨였다. 어쩐지 내 기도형식에 그 이름을 붙이면 딱이다 싶어 반가웠다.
안 그래도 마음에 원(願)이 있을 때 중얼거리듯 하는 기도가 부끄럽던 차, 화살처럼 날려도 기도의 모양새는 갖춘다니 복음이 따로 없다. 실제로 무릎 꿇지 않고도 그런 혼잣말이 현실로 이루어진 소소한 경험은 몇 번 있었다.
내 기도의 주제는 일상의 감사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내 기도의 엑기스라고나 할까. ‘유퀴즈온더블록’이라는 방송예능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온 열 살짜리 꼬마가 하는 말,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더라구요.’ 겨우 십 년의 생애에서도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세상사,
우리네 삶의 키는 내가 잡았다고 생각해도 바람은 어디서 불어올지 모르는 일이다. 보통 기도의 내용은 ‘무엇 무엇을 해달라’는 요구가 주를 이룬다. 요구라든가 부탁에 약한 내 소심함도 어설픈 믿음과 더하여 기도를 방해할 때, 감사와 섭리의 근원을 찾으면 평정이 온다.
오래 전 조그만 교회에서 일할 때였다. 젊은 목사들을 따라 근교의 보신탕집을 찾았다. 스트레스 많고 근무의 강도가 센 교역자들은 의외로 보신탕을 즐긴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고 생전 처음 그 맛이 궁금해 따라갔다.
커다란 냄비에서 갖가지 야채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동안 한 사람이 간단한 식사 기도를 했다. 감사도 표했으니 이제 먹어볼까 눈을 뜨자 찌개 냄비에는 수육이 가득 올려져 있다. 우리가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마지막 순서로 고기가 온 것이다. 그러자 기도를 마친 그가 아주 반색을 했다.
“역시 기도는 좋은 것이여~” 어쩌면 그런 소박함과 유치함도 기도의 맛이 아닐까. 기도에 정석은 없을 것 같다.
◑ 이복희 프로필
2009년 《에세이문학》 겨울호 등단, ‘엄마의 외출’
2018년 수필집 《안녕하신지》 상재
2019년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주관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2021년 아르코창작문학기금 수혜, 수필부문
에세이문학작가회, 일현수필문학회, 백합문인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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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선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