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감이…언제나 가슴이 설레었다.
60년 전 춘천에서 화천 간동면 오음리로 들어갈 때면 언제나 배후령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 고개는 내 유년기에 만났던 최초의 산길이었다. 외할머님 댁은 화천에 있어서 600고지가 넘는 고개를 버스로 넘자면 차멀미를 심하게 하여 나는 늘 걸어 다니길 원했다.
시내를 벗어나면 앞이 가로막힌 가파른 언덕길이 꼬불꼬불 이어지는데 가도 가도 끝없는 길을 타박타박 걷다 보면 점심때가 되어야 겨우 산마루턱에 닿았다. 가끔 군인 트럭이 덜컹대며 달아나고 어쩌다 헌 병 초소가 보일 뿐 사람 그림자는 찾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외할머니는 어린 내가 걷는 게 안타까웠던지 늘 헌병 초소가 나타나면 한 구간만 군용버스를 태워달라고 애원했다. 어깨에 총을 멘 헌병들은 귀찮다는 듯 외면하다가도 여섯 살 먹은 나를 보면 할 수 없이 군인 트럭을 세워주었다.
겨우 한 구비를 타고 내리면 외할머니는 내가 측은했던지 딸기도 따주고 개암도 따주면서 계절 따라 피어나는 꽃 이름, 나무 이름을 가르쳐주셨다. 우리는 어머니가 싸준 감자와 고구마, 주먹밥을 산기슭에 앉아 먹으며 꽃반지를 만들어 끼고 아카시아꽃도 따면서 노닥거렸다.
먼 산에서는 뻐꾸기, 쪽박새 우는 소리가 들리고 가까이에서는 매미 우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그 때문인지 숲속은 더욱 싱그럽게 보였다. 눈보라 치는 엄동설한엔 쓰리쿼터(미군 트럭을 개조한 시외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는데, 나는 걷는 것이 훨씬 더 편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무슨 일인지 고등학생이었던 외사촌 오빠와 외당숙 오빠, 외 육촌 오빠와 함께 칼바람이 부는 배후령고개를 넘게 되었다. 하얀 눈이 쌓인 산길을 미끄러지며 넘다가 귀도 시리고 발이 시려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오빠들은 서로 먼저 업어주겠다고 다투는 통에 호강하면서 이 오빠, 저 오빠 등에 업혀 고개를 넘었던 기억이 난다. 온종일 산길을 걷고 마지막으로 동네 언덕을 내려가면 어느새 훤하게 뜬 둥근달이 먼저 마중을 나와 반기곤 했다.
배후령고개는 외사촌 언니를 눈이 아프게 그리워하며 넘던 길이다. 도시에서 곱게만 자란 나는 어머니의 눈을 피해 시골 아이들과 잠자리를 잡고 피라미를 잡으며 흙강아지로 뒹구는 것이 좋았지만 서너 살 위인 외사촌 언니를 만날 수 있다는 행복감이 몇 배 더 컸으므로 언제나 가슴이 설레었다.
그곳에 가서는 언니가 물을 먹으면 나도 물을 먹고, 화장실엘 가면 나도 쫓아가 기다리고, 공부를 하면 같이 책을 보았으므로 ‘원숭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호롱불 아래 잠자리에 누우면 언니에게 으레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눈이 말똥말똥한 나는 언니 이야기를 귀담아듣다가 이야기가 끝나면 또 다른 이야기를 해달라고 보챘다. 밑천이 다 떨어진 언니는 언제나 항아리 장수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나는 연실 잠에 취한 언니를 깨우며 “언니, 그다음엔 뭐야” 하고 물으면 ‘아직도 항아리가 굴러가고 있어!’ 했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또다시 언니를 깨우면 “아직도 데굴데굴!” 잠에 취해 몽롱한 채 중얼거렸다. 그런 언니가 좋아서 학교를 들어가서도 봄, 여름, 겨울방학 때면 어김없이 외가를 찾곤 했다.
배후령은 또 친척 아주머니 말에 속아서 울고 넘던 고갯길이기도 하다. 외할머님 댁에는 먼 친척뻘 되는 아주머니가 자주 찾아오곤 하셨다. 놀부 심보를 가진 아주머니는 나만 보면 “어젯밤 너희 엄마를 중이 업어갔어.” 하고 천연덕스럽게 둘러대며 내 심사를 뒤틀어 놓았다.
계속해서 나를 놀리는 줄 알면서도 그 사실이 못 미더워 나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외할머니를 졸라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떼를 썼다. 외할머니는 울며 보채는 나를 데려다주려고 사흘 만에 다시 배후령고개를 넘었다.
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아주머니의 놀림에 훌렁 넘어가서 나는 수없이 춘천과 화천을 울며 들락거렸던 기억이 난다.
배후령고개는 동화 속 어린 심성을 흔들어 놓던 무지개 길이었다. 황소울음이 새벽잠을 깨우는 아침이면 외할아버지는 지게에 꼴을 베어오시고 외할머니는 쇠죽을 끓이느라 봉당에 앉아 무쇠솥 걸린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그 자욱한 연기에 코가 매워 연실 재채기를 하면서도 빠지직 소리를 내는 솔가지를 아궁이에 넣는게 재미있었다.
어느 날은 김을 매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술지게미를 가져오라고 하여 언니와 함께 가지고 가다가 항고 속의 술맛에 취해 산길에서 그만 잠이 들었던 일도 있었다. 이웃의 욕쟁이 할머니가 무서워 달아나고 참새고기 먹던 오빠가 식인종 같던 일….
한여름이면 아이들과 시냇가에 나가 가재 잡고 송사리 잡으며 신이 났었고 느티나무 아래에서 젓가락 꿰인 감자 옥수수를 먹으며 맨발로 고무줄놀이를 하던 모습, 저녁엔 멍석 펴고 앉아 쑥불 피워 놓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사촌 언니와 북두칠성 찾던 일도 잊을 수 없다.
▲ 60년이 흐른 지금 배후령고개는 터널이 뚫리면서 온종일 걷던 길이 한 시간이면 충분히 닿게 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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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엔 지붕만 남은 눈 속에 갇혀 쪽문으로 옆집 순이를 불러 얼음판으로 나가 썰매를 탔고, 밤이면 화롯불 끼고 앉아 고구마랑 밤을 구워 먹을 때면 멀리서 짐승 우는 소리, 가랑잎 구르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경험들이 계절마다 나를 외가로 불러들였던 것 같다. 배후령고개는 어린 나에게 희로애락을 선물해준 우상이었고 인내심과 끈기를 키워준 대상이었다. 먼 친척뻘 되는 아저씨는 그 고갯마루에서 호랑이를 만났다고 겁을 주며 갑작스럽게 부딪히자 그놈이 꽁지가 빠지라고 달아나더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외사촌 언니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외가는 춘천으로 이사를 나오면서 나도 배후령고개와 이별을 하게 되었다.
60년이 흐른 지금 배후령고개는 터널이 뚫리면서 온종일 걷던 길이 한 시간이면 충분히 닿게 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지금도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 순수했던 그 고갯길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기며 무지갯빛을 띄우는데 강산이 변했으니 길은 간데없고 그리움만 남아 나를 부르고 있다.
◪프로필
-1990년 <수필문학>으로 등단
-수필문학추천작가회, 강원문협, 강원수필, 춘천문협 회장 역임,
-국제펜문학 이사, 한국수필문학가협회 부회장, 수필문학․편집위원.
-저서 : 수필집 <호수지기>외 11권,
-수상 : 강원도문화상, 연암수필문학상, 김규련수필문학상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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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선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