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현시욕…타인을 관객으로 여긴다.
인생은 타인을 배우는 긴 시간이다. 현자(賢者)는 타인에게서 나를 보고, 우자(愚者)는 이방인을 본다. 나는 너에게 너고, 너는 너에게 나다. 너와 나를 반 바퀴만 돌리면 네가 내가 된다. 한데, 그 이치를 깨닫는 데 평생이 걸린다. 아니, 평생을 살아도 절반도 못 깨우친다.
나는 관계로 정의된다. 자기현시욕이 강한 사람은 타인을 관객으로 여긴다. 자기는 주목받아야 하는 주연, 타인은 주연을 빛내는 조연쯤으로 생각한다. 눈치 빠른 관객은 무대를 떠나고 덜렁 주연만 남는다. 관객이 떠난 무대는 텅빈 공간일 뿐이다.
한비자는 “사물에는 이치가 있어서 서로 다그칠 수 없다”고 했다. 누구든 속내를 들여다보면 나름의 얘기가 있다. 사람은 자신의 그릇만큼 담는다. 얕은 물은 종지 하나 띄우지 못한다. ‘너는 내가 잘 알아’는 상대를 쉽게 보는, 성급하고 어리석은 말이다.
존재는 다의적이다. 다양한 이유로 내가 존재한다. 계곡은 꼭대기를 올려다보고, 정상은 계곡을 내려다본다. 그 둘이 만나 산이 된다. 계곡과 정상을 오르내리는 새들의 날갯짓에도 나름의 사정, 각자의 연유가 펄럭인다.
지금 이 자리에도, 지금 이 마음에도 온갖 이유가 있다. 누구도 온전히 세상을 모르고, 누구도 여전히 타인을 모른다. ‘나름의 이유’가 인간의 헤아림을 넘어서는 까닭이다.
인간의 이해는 늘 근사치다. 창가를 스치는 고즈넉한 농촌 들녘 풍경에 농부의 땀은 보이지 않는다.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내려오는 늦가을 햇살은 맑고 상쾌하지만 삶의 끝자락을 예감하는 잎새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는 근사치로 이해하고, 근사치로 공감한다.
나름의 처지를 외면하고 공허한 담론만 읊조린다. 타인을 헤아리는 최고의 잣대는 역지사지(易地思之)다. 그건 타인의 시선으로 타인을 보는 눈이다. 전지적이 아닌, 객관적 참견시점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에게 이 말을》에 나오는 문구를 우리는 얼마나 가슴으로 받아들일까.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어찌 제가 천국의 기쁨을 누리겠습니까? 저주받은 자들을 불쌍히 여겨 천국으로 들여보내든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어 고통 받는 그들을 위로하게 하소서.”
▲ 자기현시욕이 강한 사람은 타인을 관객으로 여긴다. 자기는 주목받아야 하는 주연, 타인은 주연을 빛내는 조연쯤으로 생각한다. 눈치 빠른 관객은 무대를 떠나고 덜렁 주연만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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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태계의 본질은 상호 의존성이다. 서로를 의지해 서로를 지키고 종족을 번성시킨다. 아픈 개미는 늙은 개미와 함께 외곽에 머문다. 동족을 감염에서 보호하려는 본능에서다.
흡혈박쥐는 빨아뒀다 먹고 남은 피를 서로가 서로에게 나눠준다. 한데, 자기에게 피를 준 박쥐를 찾아 자기의 몫을 돌려준다.
우월한 존재일수록 종족을 지키려는 연대의식이 강하다. 유대교 현자 힐렐은 인간이 누구이어야 하는지를 한 마디로 압축한다. “네가 너를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너를 위하겠는가. 하지만 네가 너만을 위한다면 너는 누구인가?”
탁월한 종족은 공생의 의미를 안다. 내가 살려고 너를 죽이지 않고, 너를 살려 더불어 나도 산다.
마음은 작고도 큰 공터다. 채우려 하지 않는 자에겐 좁쌀만 하고, 채우려는 자에게는 바다만큼 넓은 공간이다. 마음이 협소하고 정신이 빈곤하면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그에게 타인은 그저 스쳐가는 타향인이다.
인간은 늘 결핍된 무엇이다.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지 않으면 목마른 채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목마른 누군가에게 물 한 종지는 건네주고 있는가. 내가 나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 신동열 작가/시인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경제신문에서 기자와 연구위원을 지냈다. 저서로는 <굿바이 논리야> <내인생 10년 후> <구겨진 마음펴기>가 있다. 2017년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하루>와 <독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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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선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