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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1.09.20 [04:19]
<인터뷰> 연재소설 ‘혈맥(血脈)’의 박우목 작가(중편)
백제는 故鄕! “倭에서 日本 국호 개칭”
 
소정현기자

지방행정기구 22담로倭國도 하나의 통치지역

일본 인구 8할 백제 도래인 후손 곳곳에 흔적

 

동북아시아 백강(白江) 전투일본은 독립의 길

과거 선조와 단절된 삶일본인 족보문화 희박

 

백제의 담로(檐魯) 제도와 일본 측에서 한국의 통치의 근거로 주장하는 일본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양국 간 견해가 충돌된다.

 

혈맥(血脈)의 박우목 작가

담로(檐魯)가 일본에 설치, 운영한 백제의 행정기관임은 분명한 역사기록이다. 백제는 고구려의 잦은 침공과 신라와의 불화로 불안한 터라 일찍부터 백제인이 많이 이주해 사는 왜국(倭國)에도 통치기구를 설치했다. 그것이 담로라는 지방행정기구인데 22개에 달했으며 왕자나 귀족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백제가 망했을 때 규슈지역으로 망명한 백제인이 수십만 명에 달한 것도 담로가 있어 가능했다.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존재했으며 일본이 그걸 통해 가야를 통치 수준에서 영향력을 구사했던가는 그 진위를 가리는 게 간단하다. 한 마디로 그 설은 역사를 왜곡해 변조하는데, 명수인 일본 사학자의 위작이다.

 

우선 임나본부라는 통치기관이 일본이 파견한 양 일본 국명을 붙였는데, 이게 제 꾀에 넘어간 자충수가 되었다. 금관가야(金官伽倻)가 주축이 되어 가야제국을 다스리던 시기는 3-4세기로 왜국(倭國)이 있었을 뿐 일본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정식으로 쓰이기 시작한 해는 670년으로 백재가 망한 10년 후로 백제 의자왕의 이복동생인 교기가 왕위에 오르면서 새로 제정한 국호가 일본이다. 따라서 임나본부가 일본기관처럼 명칭을 붙인 건 허위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현재 역사학계에서 정설이 되다시피 한 설에 의하면, 일본이 철석 같이 믿고 있는 일본서기 역사서라는 게 우리의 삼국사기를 팔구십 퍼센트나 그대로 베꼈다는 것이다.  

 

현재 역사학계에서 정설이 되다시피 한 설에 의하면, 일본이 철석 같이 믿고 있는 일본서기’(日本書紀) 역사서라는 게 우리의 삼국사기를 팔구십 퍼센트나 그대로 베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일본서기는 백제 부흥운동을 완전히 단념하고 국호를 왜()에서 일본어로 바꾸는 때에 맞춰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우리 사기에는 임나본부라는 게 없는 것이다. 4세기경 가야가 신라보다 강했을 때 가야지역에 왜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것을 오해했거나 고의로 왜곡하여 마치 통치기관이 주둔했던 것처럼 조작했을 지도 모른다.

 

    

 

일본문명의 초석과 근간을 백제문명과 동일시하는 역사적 맥락을 심층 분석하여 달라.

 

일본문명이 선진화 되는 과정은 일반적인 과정과 다른 면이 있었다. 문화의 이입(移入)이나 융합과정의 충돌 같은 부작용이 없었다. 예컨대 천황위의 계승만 해도 장유유서의 윤리를 따르듯 모후를 황위에 추대했다가 삼촌에게 양위시키고 그 후에야 자신이 등극하는 수순을 밟았다.

 

그런 원만한 황위계승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도래인(渡來人, 주로 기원전부터 7세기까지 한반도와 중국 대륙으로부터 일본 열도로 이주한 집단)이라는 공통된 정체성 때문이었다. 고향이 그리운 고향까마귀들이 뭉쳐 나라를 세우려 한다는 대사는 그들을 공고하게 단결시킨 것이다.

 

백제인이 대거 일본열도로 이주해 감으로써 자연스럽게 문화가 섞이고 동화되었으며 문화의 충돌현상이 덜 빚어졌다. 일본의 문명은 사람(, 히노)과 물건(, 모노)이 그 주인공인 그 두 가지가 다 백제에 그 뿌리가 있거나 영향을 받았다.

 

문명의 주체인 사람의 경우, 이민족이 없음으로 충격이나 배타적인 거부현상이 없었다. 일본 인구의 8할이 백제 도래인의 후손이라는데 동의하지 않는 이가 없음으로 일본 문화는 곧 백제문화의 복사판이라는 정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어의 경우 한문을 전수하고 가르친 이는 백제의 왕인(王仁) 박사 이었으며 불교 또한 백제가 전수했다.

 

물건에 있어 일본인은 맹목적이라 할 정도로 백제 것을 최고로 여겼다, 오죽하면 백제 것이 아니면 쓸모가 없다는 구다라(백제의 옛 명칭) 나이’(らない)라는 말이 일본인 인식에 깊이 똬리를 틀고 있어 요지부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문명의 경우 문화의 충돌이나 수용과정의 갈등 같은 정착 상 시련이 없었고 따라서 본향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대단해서 전통문화의 보존이 뛰어나다. 이런 면에서 우린 서양문물을 지나치게 허겁지겁 수용한 감이 있다.

 

일본이 전 국민의 축제로 여기는 마츠리가 각 지방마다 성대하게 열리는데 딱 우리네 풍물놀이와 유사하다. 예컨대, ‘아오모리 네부타 마츠리’(Aomori Nebuta Matsuri, 매년 82일부터 7일까지 아오모리 시내를 중심으로 열리는 민속 축제)의 경우 화려하게 차려 입은 무희가 무려 5백에서 2천 명이나 제등(祭燈)으로 장식한 수레를 따라 춤을 추는 광경은 말할 수 없는 흥과 신명을 자아내는바 그 흥을 즐기려고 오는 관광객이 무려 3백만 명이나 된다.

 

그런 유의 민속축제가 전국에 5백 개 가까이 있으니 그것이 생산하는 경제적 외교적 효과나 국민 자부심의 고양이나 단결심의 진작에 얼마나 유익하겠는 가 부럽고 두렵다. 저런 전통문화의 보존과 가치부여에 뛰어난 게 도래인이 고국이 그리워 고국에서처럼 살림살이를 차리고 살았는데, 심지어 굴뚝까지도 동일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4세기경 가야가 신라보다 강했을 때 가야지역에 왜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것을 오해했거나 고의로 왜곡하여 마치 통치기관이 주둔했던 것처럼 조작했을 지도 모른다. 

 

백제 도래인(渡來人)의 일본 정착의 유형을 통합적으로 예시하여 달라.

 

도래인의 일본열도에로의 이주는 대략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개인적 이주이다. 왜의 한 국가로서 틀을 잡는 데는 인재 노동력, 기술, 경험 등 광범위한 인력이 필요했으므로 이주민 특히 백제인의 이주는 대환영이었다. 백제는 왜를 하나의 통치지역으로 만들 생각임으로 적극 장려했다.

 

그 둘은 정부에서 담로 같은 통치 또는 지방행정을 수행할 요원들의 이주다. 백제의 왕, 귀족등 엘리트, 기술자나 예능인을 위시한 장인(匠人) 그룹 등 다방면의 인재들이 이주했다.

 

그 셋은 백제에 정변이나 전란이 일어나 망명 또는 피신하는 이주가 있다. 숫자로는 세 번째가 가장 많았는데 의자 왕 때 일어난 정변에는 왕의 서모인 왕대비(교기대군의 모친), 교기 대군(후에 일본 천왕이 됨), 사택지적 대좌평(후에 일본 킹메이커에 최고 부자가 됨) 등 왕족 귀족이 대거 망명했으며, 백제가 백강구 전쟁에서 패하자 망국이주민이 당시로서는 대규모인 70여만 명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백강전투 귀결에서 백제부흥이라는 심각한 부담에서 풀려난 일본은 독립적인 어엿한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를 맞았다.   

 

동북아 정세의 일대 분수령이자, 일본의 백제 부흥운동의 종착역인 백강 전투’(白江戰鬪)에 역사상을 부여하여 달라.

 

백제 부흥운동의 마지막 저항인 백강구(白江口) 전투는 백제가 항복한 660년으로부터 3년 후인 663년에 금강하구 바다에서 벌어졌다. 신라와 당 연합군은 백제와 일본 지원군과 싸웠다. 열세인 백제부흥 함대는 나당함대에 궤멸돼 해전은 나당군 승리로 끝났다. 백강전투의 패전은 백제의 부흥의 종언을 의미했다. 따라서 백강구해전은 백제의 멸망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패전이었다. 그리고 전쟁 당사국마다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백제는 패전국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영원히 사라졌다, 백제는 어느 나라보다도 국력이 다양하게 강했던 나라였다, 그토록 허무하게 망한 게 납득이 안 된다. 거안사위(居安思危, 나라가 편안할 때 닥칠 위기를 생각해 대비한다.) 하지 않은 교만 때문인지, 호전(好戰) 때문에 국고가 고갈되고 내치(內治)에 소홀한 탓인지? 왕의 황음무도(荒淫無道, 주색에 빠져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도리를 돌아보지 않음)로 민심을 잃은 탓인지 살펴봐야할 것이다.

 

신라는 나라의 존폐가 걸린 전쟁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당나라까지 끌어들여 동족국가를 멸망시킨 것은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처사였다. 그러나 허구한 날을 전쟁으로 지새우는 3국정립관계를 3국통일로 변화시킬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는 그 전쟁이 대의를 지켰다 할 수 있다. 아무튼 신라는 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3국 통일을 했다.

 

백강전투의 종료로 역사적으로 의의 깊은 변화를 할 수 있었던 나라가 일본이었다. 백제부흥이라는 심각한 부담에서 풀려난 일본은 독립적인 어엿한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를 맞았다.

 

백강전투 7년 후인 670년에 드디어 왜국은 국호를 왜()에서 일본(日本)으로 바꿨다. 천황가는 교기 대군의 어머니(무왕의 차비)를 시작으로 외숙(사택지적)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가 일본으로 바꿀 때 교기가 천황(天智王)으로 등극했다.  

 

마지막 백제부흥 운동의 종식후, 백제 왕자 교기(翹岐)대군과 대관료 사택지적(砂宅智積)이 새로운 일본 부흥의 주역으로 거론되는데?

 

그 주역은 의자왕의 이복동생으로 백제에 정변이 일어났을 때 일본으로 망명했던 교기대군과 중신 사택지적이었다. 사택지적은 백제의 대좌평을 역임한 관리로 대좌평(大佐平)의 직에까지 올랐다. 사택지적은 백제 후기의 대성팔족(大姓八族)의 하나였던 사택씨(砂宅氏) 가문을 말한다.

 

모국에 왕이 있어 담로를 통해 왜국을 다스리므로 독립된 국가형태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해서 어디까지나 분국의 위치에서 모국 결정을 따랐던 것이다. 모국 백제가 망하고 부흥운동마저 끝났으니 왜국한테 저 이상 상국(上國)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강전투 7년 후인 670년에 드디어 왜국은 국호를 왜()에서 일본(日本)으로 바꿨다. 천황가는 교기 대군의 어머니(무왕의 차비)를 시작으로 외숙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가 일본으로 바꿀 때 교기가 천황(天智王)으로 등극했다. 교기는 백제 제30대 왕 무왕(武王)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 의자왕의 아우이다.

 

백제 후기의 대성팔족(大姓八族)의 하나였던 사택씨(砂宅氏) 가문은 일본 문명의 초석을 쌓았다. capture koreanhistory.org 

 

백제가 망하지 않았으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없었을 것이다, ‘백강구 전쟁은 역사적으로 의의 깊은 모멘텀 이었다. 3국지도가 바뀌었으며 3국과 일본과의 관계가 새로이 정립되었다. 더는 한반도로 해적질이나 다니는 나라가 아니었다. 절치부심 국력을 키웠다, 근대화의 물결을 현명하게 탔다.

 

화혼양재(和魂洋才, 정신은 일본 것 기술과 재능은 선진 서양의 것) 운동이 근대화의 멋진 결실로 나타난 게 명치유신(明治維新) 이라는 대변혁이었다. 그 불씨를 놓은 사람이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우리의 서당 비슷한 배움터)를 세운 27세의 청년 요시다 쇼인’(吉田 松陰) 이었다.

 

어느 사학자는 그가 과대망상자일 뿐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니라고 폄하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젊은이들을 어항에 가두지 말고 저 과대망상 같이 광대무변한 망망대해로 보내라는 것이다. 라이트 형제가 무거운 동력장치를 탑재하고 하늘을 날겠다고 했을 때 대학교수조차도 그 신념을 과대망상이라고 비웃었다. 필자는 그런 유의 과대망상을 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발상의 주인공이 약관이라는 사실에 환호하는 것이다.

 

▲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최초의 교류를 한 것은 가야 제국(諸國)을 통치한 금관가야가 일본열도에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딸인 묘견 공주(妙見公主)를 파견한 게 공적 교류의 효시이다. capture youtube bBjGz1B5J6A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최초의 교류를 한 것은 가야 제국(諸國)을 통치한 금관가야’(金官伽倻)가 아닌가?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최초의 교류를 한 것은 가야 제국(諸國)이다. 금관가야가 일본열도에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딸인 묘견 공주(妙見公主)를 파견한 게 공적 교류의 효시이자 백미였다.왜냐하면 나라가 없는 일본열도에 묘견 공주가 최초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김수로 왕에게는 102녀의 자식이 있었는데 둘째 딸인 묘견 공주가 규슈지방으로 진출, ‘야마이(야마타이) 왕국을 세운 히미코는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로서 가야와 일본열도는 활발하게 교류했다4세기에 이르러 가야는 왜와 친선관계를 유지했으나 왜와 신라는 적대관계였다. 신라는 가야의 비옥한 땅과 소금을 얻기 위해 서진정책을 펴고, 백제는 왜를 꾀어 가야를 공격해 빼앗겼던 섬진강유역을 되찾았다.

 

5세기에 이르러 국력이 쇠퇴한 가야가 신라에 항복했다. 가야문화가 신라문화에 상당히 영향을 주었으며 일찍부터 교류가 활발했던 일본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한국은 족보문화가 체계적으로 확립되어 있어 선대의 가계추적이 상당히 용이한 편이다. 상대적으로 일본 선조의 가계도는 한국에 비해 어떠한가?

 

필자는 이 과제에 관해 연구를 한 적이 없고 상식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 우리가 한 문화 전수와 족보가 어떤 연관성이나 영향력을 구사했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일본이 족보에 대한 인식이 어떤 지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짐작할 수가 있다.

 

일본의 민족적 뿌리가 한반도라면 일본 자체의 세계(世系)가 성립될 수가 없고 시조(始祖)에서 어느 대까지의 대동보(大同譜, 동성동본에 딸린 모든 파()의 족보를 합쳐서 엮은 족보)를 한국서 찾아 세워야 완성될 것이다.

 

그런 뿌리를 캐기 어려움 때문인지 일본인은 유명한 가문이거나 가문을 꼭 언급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족보를 들먹이지 않는다. 우리처럼 자신이 어느 성씨의 본관(本貫)이 어디고 무슨 파의 몇 대 손이라는 설명을 듣기 힘들다. 그리고 기록하고 보관하는데 뛰어난 국민성에 비해 족보를 비치 보관하는 관습이 퍼져있지 않다.

 

그러서인지 일본인은 비교적 조상 탓을 하지 않는 편이고 조상의 음덕(陰德)을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 아무개의 자손임을 자랑으로 여기는 의식이 희박한 것은 조상과 단절된 삶을 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인들이 성을 만든 경위는 대략 이러하다. 소나무와 인연이 있다 해서 소나무 송() 자를 넣어 성을 정한다던지, 강이 유난히 많은 일본이라 가와() 자를 성에 넣은 것이나 생활에 밀접화게 연관된 밭()의 자를 사용하는 게 다 그러하다.

 

일본의 성씨에 대한 의식이이 얼마나 무성의하고 무질서한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대 사건이 있었다. 명치유신 때 일본정부는 호적이나 인구통계의 틀도 잡고 실태도 파악하기 위해 약 8만 개의 성을 제시, 마음대로 잡아 등록하도록 허용했다, 실로 파격적인 일종의 대사면이었다. 말하자면 살인강도 A씨가 K씨로 둔갑, 새 출발을 하게 만둔 것이다.

 

놀랍게도 그런 희한한 성씨 혁명은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지주가 불명한 농지 중에서 자기 소유임을 소명하면 인정해 소유권보존등기를 해주는 농지혁명이었다. 그때 성을 원하는 대로 택하면 호적을 정리해주었다, 그로써 한국사회에서 반상(班常)의 구분은 사라졌다. 반상이란 조선 후기에 양반(兩班)과 상인(常人)을 아울러 이르던 말이다.

 

양반이 되려면 가난한 양반의 족보를 사거나(投託), 할보(割譜 족보를 떼어 내 독립된 가승보’(家乘譜) 할 때 그걸 공개적으로 인정해준 것이다. 가승보는 본인을 중심으로 하여 직계존속(시조까지)과 직계비속까지 이름과 사적을 기록을 말한다.

 

문화를 전수하면서 족보의 관리 유지를 소홀이 하도록 했을 리 만무함으로 일본이 가문의식이 낮고 가문의 영광을 소중하게 보지하려는 노력이 부족함은 자신의 선조의 뿌리가 조상의 땅에 있고 종가(宗家)에서 자손 된 도리를 다하리라는 안도감에서 비롯되리라 본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일본을 가르쳐야 하는 일은 아무리 일본서기를 거짓으로 고쳐 쓴들 저들의 뿌리는 한반도에 있어 거기가 조상의 땅이기 때문이다.

 


원본 기사 보기:모닝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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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9/09 [15:05]  최종편집: ⓒ womansen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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