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원이’와 ‘사랑이’ 부부
DMZ생명‧평화 대장정에 참여한 지도 어느새 2년여로 접어든다. 그중 특히 나를 사로잡은 건 23년 2월 11일에 열린 14차 대장정이었다. 종합운동장에서 출발해 백마고지, 전적기념탑, 양지리, 이길리 두루미 서식지로 이어지는 강원도 철원 평화누리길 2코스였다. 그곳은 두루미가 머무는 코스이기도 하다.
두루미와 재두루미는 흔히 달력이나 엽서, 화가의 그림에 등장하곤 한다. 그림 속 재두루미 한 쌍의 나르는 모습은 고고하고도 사랑스럽다. 수년 전 가족과 함께 철원에 철새 구경을 간 적이 있다. 철원 관광의 백미는 새벽녁과 황혼녁을 들 수 있다.
새벽녘이면 겨울철새들이 먹이를 찾기 위해 비상한다. 대장의 신호에 맞춰 일제히 부르는 합창 소리는 자연에 울려 퍼지며 경이롭기까지 하다. 해질 무렵 날개를 퍼덕이며 귀가하는 철새들의 모습 역시 장관이다. 그들의 활기찬 모습에서 마치 인생의 황금기를 보는 듯했다.
우리나라 북부지역 철새도래지로 파주, 김포지역 등 여러 곳을 들 수 있다. 그중 강원도 철원은 넓은 농경지와 제방 안쪽 수변 지역은 두루미와 오리, 기러기류의 주요 먹이 장소다. 철원 철새도래지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두루미류 도래지로도 유명하다.
그중에서 두루미 가족을 만나고 두루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행운이었다. 재두루미 철원 보호소에 두 마리의 재두루미가 보호받고 있었다. 그들은 불행히도 텃새 신세가 되었다. 마치 우리가 수족이 불편하거나 병에 걸리면 요양원에 가듯 두루미도 그 처지였다. 그런 와중에도 재두루미 ‘사랑이’와 ‘철원이’의 사랑 이야기는 참 애틋하고도 감동적이다.
암컷 재두루미 ‘사랑이’의 원래 고향은 시베리아 아무르강이다. 그곳에서 철원까지 힘차게 날아왔다. 강원도 철원지역이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추운 곳에 속하지만 재두루미에게는 안성맞춤인 날씨다. 재두루미는 겨울 철새다. 그들은 철원보다 더 추운 시베리아에서 1,000 km를 넘게 날아와 보내다가 따뜻한 봄이 되면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 번식한다.
불행히도 사랑이는 15년 전 사고로 날개를 다쳐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였다. 가시철조망이 원인이었다. 관람객들이 쉽게 넘나들지 못하게 설치한 가시 울타리가 동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기가 된 셈이다.
사랑이는 DMZ두루미평화타운 두루미 쉼터에서 보호받고 있다. 보호소는 부상당한 두루미들이 안전하게 지내도록 최선을 다해 돌보는 역할을 한다. 또한 DMZ두루미평화타운 두루미 쉼터에서는 두루미들의 생태계와 두루미의 역사, DMZ 지역의 환경과 평화에 대한 교육과 전시도 진행한다. DMZ 지역 관광객들의 이해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철새지만 철원에서 15년째 지내던 재두루미 사랑이에게 이변이 일어났다. 보호소에 혼자 외롭게 갇혀 지내던 암컷 재두루미 사랑이에게 수컷 재두루미가 나타난 것이다. 바로 발과 부리가 동상에 걸린 철원이었다.
사랑이가 처음 본 철원이의 모습은 이랬다. 멋진 날개가 있었고 부상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철원이는 혹독한 추위에 동상으로 발가락을 다쳤을 뿐이다. 완치되면 언제든 날아갈 수 있는 상태였다.
반면 사랑이는 구조 당시 우측 날개가 세 곳이나 복합 골절되었고 근육과 인대까지 다쳐 날지 못했다. 사랑이에 비해 철원이의 부상은 조족지혈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듬해 봄이 되면 철원이가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니 사랑이의 심정은 착잡했고 썩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러면서 보호소에서 티격태격 지내던 사랑이와 철원이에게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철원이가 보여준 구애의 춤과 사랑의 여러 제스츄어로 그들은 부부의 연을 맺는다. 그 결과 사랑이가 지난 2020년 4월 11일과 13일, 두 차례에 걸쳐 알을 낳았다.
두루미 부부는 40일 가까이 번갈아 알을 품었지만 안타깝게도 부화에 실패했다. 월동지에서 부화는 어려웠나 보다. 언젠가 사랑의 결실로 건강한 2세가 탄생하길 간절히 바란다.
철원이는 회복 후 수시로 방사장 안팎을 자유롭게 오가며 사랑이와 함께 날아가길 염원했으나 허사였다. 결국 그 해 6월 철원이는 중국으로 홀로 날아갔다. 중국에서 여름을 보낸 철원이가 11월 겨울이 되자 사랑이를 찾아 다시 철원으로 돌아왔다. 그 후 계절이 바뀌어 두루미가 다시 북쪽으로 날아갈 시기가 왔다.
그런데 철원이가 돌아가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오로지 사랑이 곁을 지키자고 작정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보호소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무엇이 철원이로 하여금 그런 결심을 하게 만들었을까? 사랑의 힘은 무한하다고 봐야겠다.
두루미의 특성은 일부일처제다. 일부일처제는 동물이나 조류가 일정한 지역에서 방랑하지 않고 계속 머무르는 행동을 말한다. 두루미는 번식을 위해 알을 낳으려면 특정한 지역에서 일처제를 따라 살아가야 한다. 특히 철원지역에서는 두루미들이 일처제적 행동을 펼치기 때문에 이 지역이 두루미의 번식처로 알려져 있다.
두루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짝을 지켜 평생을 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특징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놀라움을 선사한다. ‘철원이’와 ‘사랑이’ 부부처럼 서로를 위해 노력하고 지켜주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많은 용기와 힘을 주리라.
인간도 마찬가지로 서로를 위해 힘쓰고, 지켜주며 지낸다. 동물의 참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다르지만 많은 이들에게 서로를 위한 노력과 희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상기시켜준다. 재두루미 ‘철원이’와 ‘사랑이’의 사랑 이야기가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 주는 시사점 또한 크다. 서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만물이 가진 사랑의 에너지라 본다. 사랑의 시너지는 어디까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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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선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