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광복의 의미는?
8·15 광복은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되찾은 사건이다. 이 날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슬픔의 기억이지만, 일본인의 억압과 학대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농민들은 농민대로 징용과 공출에서 해방되었고, 노동자와 도시거주민들은 일본인의 명령과 멸시에서 해방되었고, 수많은 청년들이 일제의 군수공장이나 토목공사장에서 풀려났고, 학생들은 한국 혼을 말살하려던 황국신민교육(皇國臣民敎育)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한편, 8·15광복이 일본패전의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은 분명한 객관적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민족의 광복운동이라는 주체적 요인이 없었더라면 일본의 패전이 바로 우리의 광복으로 귀결되었을지 의문이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43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점차 연합군 측에 유리하게 되어, 그해 11월말에 미국·영국·중화민국 3국은 소위 카이로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이 항복하였고, 8월 8일에는 미국과 영국, 소비에트 연방이 모여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드디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날 정오에는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방송이 라디오로 중계됐다. 한민족은 카이로 선언과 그것이 재차 확인된 포츠담 선언에 의해서,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광복절(光復節, National Liberation Day of Korea)은 한반도가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로,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국경일 및 공휴일로 법제화함으로써 매년 양력 8월 15일에 기념하고 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 해방의 날’(祖國 解放-)이라 한다.
1949년 5월 24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3·1절(3월 1일), 헌법공포기념일(7월 17일), 독립기념일(8월 15일), 개천절(10월 3일)을 4대 국경일로 하는 안건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였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헌법공포일을 제헌절로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수정하였다. 같은 해 9월 21일, 해당 수정안이 제5회 국회본회의에서 통과되었으며, 마침내 1949년 10월 1일에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게 된다.
광복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반일(反日)독립운동은 미시적인 측면에서 엄밀하게 말해 1910년 8월 22일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 때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만 35년 동안 지속된 민족주의운동이다.
그러나 거시적 측면에서는 민족독립의식이며, 국권회복의식이며, 자주의식을 함께 묶고 있는 포괄적 개념이다. 20세기 초엽, 조선의 마지막 국가였던 대한제국이 붕괴되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해서 1910년 결정적으로 국권을 빼앗기고 그 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여 우리가 해방되었던 날까지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사상과 운동까지를 아우른다.
일제 치하에서는 유독 한국인들을 완벽한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민족 말살 통치가 진행되어,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에 의거한 황국 신민화 정책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신사 참배 및 일본어의 사용을 강요하였다. 애국반을 통해 국민 생활 전반을 통제하였는데, 학교의 한글 교육은 중단되었고, 한국의 역사를 배울 수 없게 되었으며, 창씨개명이 강압적으로 행해졌다.
● 절대빈곤 ‘인구유입과 식량부족’
해방 직후 경제적 혼란과 더불어 해방 직후 미군정기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핵심요소 중의 하나는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야기되었던 사회적 혼란이다. 당시의 사회적 혼란에는 귀환동포문제와 식량문제의 두 문제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전자는 해방과 더불어 만주와 일본 등 해외로부터 그리고 북한으로부터 대거 몰려들었던 귀환동포들의 문제였으며, 후자는 일제 전시경제가 붕괴된 속에서 야기된 식량부족사태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210만 명의 재일동포들 중 약 70만 명 가까이만 일본에 남고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런 염연한 현실은 한국 내의 식량사정을 악화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해방 후 대거 유입된 귀환동포들의 대부분은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자신의 고향과 조국을 등지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일제의 전시공업화가 추진되었던 1930년대 이후, 그리고 전시체제가 본격적으로 구축되었던 1940년대의 일제 말에 들어와 대대적인 주민이동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때는 주로 북한지역에서 추진되었던 군수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거나 징병·징발 등 일제의 전시정책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이렇게 일제식민통치 기간에 자신의 고향과 조국을 떠났던 그들이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고향과 조국으로 돌아가고자 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자신의 고향과 조국에 다시 돌아왔던 그들에게 고향과 조국은 그 어떤 대책도 제공하지 못했다.
35년간의 일제식민지 통치는 한국사회의 정상적 발전을 심하게 왜곡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말단계에 접어들자 한반도는 전쟁수행을 위한 인적·물적 동원과 수탈의 강요가 극에 달하여 황폐상태에 빠져 들어갔다.
광복 당시 38선 이남 지역의 경우 생산공장 9,323개, 노무자 30만520명이었는데, 광복 후 1년이 지났을 때에는 공장 5,249개, 노무자 12만215명으로 급감하고 있었다. 이것은 광복 후 146만4520명의 실업자를 발생하게 하였다. 당시 한국인의 4.6%만이 제2차산업 부문에, 그리고 21.1%가 제3차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일본인 철수 후 교통시설의 노후와 수리부족 등으로 수송능력이 광복 전에 비해서 급속하게 감소되었다. 이것은 수송의 마비현상을 가져왔고, 국민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해방은 현실적 측면에서 우리민족의 주체적인 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일본이 패전한 결과물로서 주어졌기 때문에 8·15해방은 동시에 남북 분단을 초래하였다.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에 따른 남북 간의 정치·군사적 대립으로 인한 비생산적 지출은 남북한 모두에게 경제발전의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일제식민지에 이어 6.25 동란의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에 이어 이제는 어엿한 선진강대국의 길에 접어들었다.
● 선진 대국 ‘놀랄만한 군사‧경제력’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의 성장을 이끌고 규범을 형성하는 선도국 중 하나로 국제사회에서 더욱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할 때가 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연)는 지난 7월 17일 군사력·경제력·혁신능력·경제안보·영향력 등 5개 분야를 선정하고 G7과 한국의 위상을 비교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경제력 분야에서는 한국의 2022년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이 G7 중 미국(2위, 8.4%), 독일(3위, 6.7%), 일본(5위, 3.0%)에 이어 2.8%로 6위에 정착했다. 이와 함께 한국은 2018년 국민총소득(GNI) 3만달러를 돌파해 G7 국가들만이 포함돼있는 30-50 클럽에 세계 7번째로 진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미 군사력 평가기관인 글로벌 파이어파워(GFP)에서 발표하는 2023년 세계 군사력 지수에서 한국은 세계 6위로, G7국가 중에서는 미국, 영국 바로 다음의 순위이다. 이는 사실상 핵을 보유한 국가를 제외하면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군사강국으로 평가된다.
혁신역량에서도 한국은 선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OECD에 따르면 2021년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은 한국이 전 세계 2위(4.9%)로, G7 평균(2.6%)의 약 2배에 달했다.
이런 비약적 괄목할 발전과 제고된 글로벌 위상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경제는 중국 경제의 쇠퇴, 자국 이기적 우선주의 확산 등 대외적 여건의 불안에다 내부적으로는 고물가, 고금리 지속 등에 따른 내수 위축으로 큰 진통을 겪고 있다.
미증유 대위기를 새로운 도약의 대기회로 반전시키고, 대한민국이 지구촌 중추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정부, 기업,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아야만 진정한 광복의 참뜻을 아로새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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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선데이